영화 밀정 속 김상옥 열사 |
1913년 12월 경북 풍기(현, 영주시 풍기읍)에서 비밀결사체인 대한광복단이 조직되었다. 풍기광복단이라고도 하는 대한광복단은 의병단체를 제외하고는 국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항일운동단체로서 주로 무장투쟁을 했다. 창립단원으로는 경북 문경출신 채기중을 비롯하여 유창순, 한훈, 강병수, 김상옥 등 전국적 결사체로서, 주도자인 채기중 등 일부 인사는 1915년 7월 대구에서 박상진 등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로 발전적 통합을 이루었다.
대한광복단은 초기엔 군자금모금이나 민족반역자 응징 등의 활동을 했으나 점차 일제기관의 습격, 친일부호 암살 등으로 다양해졌다. 궁극적 지향점은 '대한광복단 선언' 끝부분에 "우리는 대한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원수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천지신명에게 맹세한다"라는 말로 정리되어 있다.
1915년엔 군자금마련과 중국내 독립운동단체들과의 연락을 목적으로 영주에 대동상점을 개설하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기도와 칠곡의 대 부호 장승원(장택상의 부) 등 친일파처단 같은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만주에서 김좌진, 노백린 등이 합류하면서 김좌진을 만주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장춘에 독립운동기지 상원양행을 설립하는 등 중국내 활동도 활발히 전개했다. 1920년에 서울에서 김상옥, 김동순, 한훈 등이 암살단과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하면서 그해 8월 24일 미국의원단의 방한에 맞춰 사이토(齋藤實) 총독과 고관들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김동순과 한훈은 체포되고 김상옥은 가까스로 상해로 망명했다.
김상옥 열사/연합DB |
1923년 1월 12일 밤 8시경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렸다. 의거 후 김상옥 의사는 경성 역에서 가까운 삼판동(현, 후암동) 매형의 집에 은신했다. 5일 후 동경 제국의회 참석차 떠나는 사이토 총독을 경성 역에서 저격하려는 거사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 한인 순사 조용수에게 은신처가 탐지되고 말았다. 1월 17일 새벽 종로서의 무장순사 14명이 은신처를 포위하자 김 의사는 몇 명의 사상자를 낸 후 포위망을 탈출했다. 눈 덮인 남산을 맨발로 넘어 왕십리 모 사찰에서 승복으로 변장한 후 효제동 동지 이혜수의 집에 숨어들었다. '밀정'에서 총 맞은 엄지발가락을 손으로 떼어 버리고 맨발로 산길을 도주하는 모습이 참담했다.
다시 동지들과 사이토 암살을 모의하던 중 그곳을 탐지한 무장순사들이 1월 22일 새벽 은신처를 포위했다.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신출귀몰하게 지붕들을 넘나들며 4백여 명의 무장순사들과 세 시간 여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접전 중 명사수답게 서대문경찰서 경부를 비롯해 몇 명을 사살했으나 실탄이 바닥나고 말았다. 잠시의 생각 끝에 상해에서 했던 동지들과의 약속대로 한 발 남은 권총을 머리에 대고 34년의 삶을 장렬히 마감했다.
의사는 1890년 서울 효제동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공장에 나가야 할 만큼 집안이 어려웠으나 성장하면서는 강한 민족의식을 보였다고 한다. 한지(韓志)라는 아호만으로도 그의 우국적 신념을 엿볼 수 있다. 3. 1운동 때는 맨손으로 무장한 일경을 때려눕히고 군도(軍刀)를 탈취했을 정도로 호협하고 의기 충만한 열혈남아였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할 때 열한 발의 총상이 있었다고 한다. 한밤의 결전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보여준다. 조국독립의 일념으로 일기당천(一騎當千), 10여 일 간 무장경찰을 우롱한 열혈의사의 투쟁은 간악한 일제를 전율케 했고, 우리민족의 강인한 기개와 민족정신을 과시함으로 써 끝내는 조국광복의 또 하나의 밀알이 된 것이다.
장준문/ 조각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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