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기꺼이 자기 비하가 가능하고 대중의 무시와 조롱을 역이용할 줄 알아야 전통적 의미에서 광대다운 것이다. 현대의 코미디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일부러 관객보다 낮은 위치에서 웃음을 유발한다.
물론 '아서'에겐 가혹한 주문이다. 그에겐 그럴 만한 심적 배짱과 여유가 없다. 그는 직업적 조커, 다시 말해 스탠드 업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남을 웃기지 못한다. 스크린을 종횡으로 빈틈없이 채우며 등장하는 제목 'JOKER'의 육중하고 비대하며 부담스럽고 과장된 타이포그래피 역시 그 자체로 이미 비극적이다. 그것은 흠씬 두드려 맞고 비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광대 분장의 비쩍 마른 아서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런데 아서가 가장 완벽한 에이론이 되는 순간이 있다. 머레이에게 자신을 조커라 불러 달라고 한 시점부터. 그는 이 극의 각본자이자 주연 배우이다. 머레이 쇼에서의 총격 사건은 그가 기획한 한 편의 촌극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대기실에서의 그는 겸손하고 어리숙한 태도로 머레이의 팬을 자처하며 머레이를 감쪽같이 속였다. 뛰어난 가장(假裝)이고 기막힌 연기다. 이처럼 아서는 조커로 거듭나면서 비로소 희극의 주인공이 됐다. 의뭉스러움을 통해 자신만의 코미디를 구성하고 연기하고 성공시켰다.
이 영화는 악당 '조커'에게 조크가 살인이 된 계기, 나쁜 짓이 일종의 농담이자 장난이 되는 과정 상 내면 변화를 보여준다. 그에게 악행이 한 편의 희극이 돼버린 작동원리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을 희화화하는 것을 견딜 수 없던 그가 그 비극적 정조를 잃지 않은 채로 희극인으로서 카운터펀치에 도달하는 과정이 아이로니컬하다.
영화의 엔딩 숏은 이점을 극대화한다. 머레이 쇼의 주제곡이었던 'Thats Life'가 낭만적으로 흐르는 와중 'The End'가 스크린 정중앙에 놓인다. 화면의 질감은 부쩍 옛날 영화 같다.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JOKER'와 다르게 엔딩 숏에는 야외 웨딩파티나 디너쇼 플래카드에 어울릴 법한 우아하고 가벼운 글자체로 이루어져 있다.
뮤지컬 배우처럼 깨금발로 춤추며 멀어지는 조커의 뒷모습. 오프닝이 비극적이었다면 엔딩의 뉘앙스는 명백히 희극적이다. 이러한 비극과 희극의 아이러니는 영화 중간에 삽입된 찰리 채플린의 영화나 비극인 줄 알았던 자신의 인생이 코미디였다고 말하는 조커의 대사로도 드러난다.
인물 조커의 조크(악행)는 그의 웃음틱처럼 병적으로 당혹스러운 것, 남과 다른 타이밍에 혼자만 웃는 것이지만 영화 조커의 조크(극劇)가 워낙에 많은 공감을 받고 있다 보니 격론이 무성한가 보다. 당연히 이 조크를 옹호한다고 해서 그 조크도 괜찮단 얘기는 아니다./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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