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세상에 이런 남의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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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세상에 이런 남의 일이

  • 승인 2019-10-07 10:56
  • 수정 2020-06-30 11:34
  • 신문게재 2019-10-08 22면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빗속을 달리던 기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박 사장네 집 지하실에서 사투를 벌인 뒤 아버지, 동생 기정이와 탈출해 집으로 가던 길이다. 지하실에 살던 다른 존재 때문에 기우는 명문대생으로 위장한 자신의 과외와 모처럼 얻은 가족 모두의 일자리를 빼앗길 위기다. 어쩌면 죗값을 치를지도 모른다. 반지하 집은 물바다가 돼 있을 것이 뻔했다. 기우는 명문대생 친구이자 자신에게 과외를 소개해 준 친구 민혁이를 떠올렸다. "민혁이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혼잣말처럼 묻는 말에 동생이 짜증을 낸다. "민혁이 오빠에게는 절대 이런 일이 생기지 않지!"

봉준호 감독은 이 대사를 영화 <기생충>의 본질을 꿰뚫는 대사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했다. 부와 직위는 가진 자에게 안전망으로 작용한다. 사업이 망해 반지하 집에 거주하게 되고, 시급 높고 편한 알바 자리에 연연하고, 타인을 지하로 밀어 넣을 일은 가진 자에게 일어나지 않는다. 기우네 가족이 신원을 속여 가며 박 사장네 집에 취업한 이유 역시 그 불가성에 대한 확신이다. 반지하 집 창문 너머로 취객이 노상방뇨하는 걸 보는 것 같은 일은 가진 자에게 일어날 리 없으니까.

#회사 건물 화장실에 어느 날 종이가 붙었다.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버릴 땐 안에 들어있는 액체를 비우고, 밖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마지막 문장은 '부탁합니다'였다. 얼마나 많은 플라스틱 컵이 먹다 남은 음료를 그대로 담은 채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는지 알만했다. 당연히 해야 하는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건, 자기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회사에서 분리수거를 하는 일은 (청소노동자가 근무하는 한) 자기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까.

화장실의 작은 '대자보'는 버스정류장 옆 휴지통을 떠올리게 했다. 휴지통 위에 올려진 플라스틱 컵 중에 음료가 남아있는 걸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나 말고' 누군가 치울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수십 개 컵의 내용물을 비워 용도에 맞게 분리하는 일은 정류장을 스치는 자신에게 일어날 리 없는 일이므로.



#어떤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 리 없다는 확신은 잔인하다. 9월 경북 영덕에서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이 3m 깊이의 지하탱크를 청소하려다 쓰러져 질식사했다. 그를 구하러 들어간 동료 외국인 세 명도 숨졌다. 탱크는 오징어 가공 과정에서 나오는 폐수를 처리하는 곳이었다. 오징어 부산물에서는 암모니아 가스 등이 발생하는 걸로 알려져 있고 사건 현장에서도 악취가 풍겼다. 숨진 네 명이 일하던 오징어가공업체 대표는 유해한 가스가 발생하는지 확인하지도, 안전장비를 착용하게 하지도 않았다. 암모니아 가스가 나오는 탱크에 아무 안전장비 없이 들어가는 건, 사장인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폐기물 탱크 안에 들어가는 것이 자기에게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유해가스가 얼마나 나오는지 사전에 확인했을 것이다. 마스크가 얼굴에 꼭 맞도록 끈을 조여 맸을 것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리 없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을 만든다. 바다거북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플라스틱을 삼킬 일이 없으니 플라스틱 빨대를 쉽게 사용하고, 누군가 치울 거라는 생각으로 내용물을 비우지 않고 일회용 컵을 버린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어렵고 험한 일을 타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지시한다. 자기 일이 아니라는 판단은 자기 바깥의 세상을 '그런 일' 투성이로 만든다. 상상하면 어떨까. 내 삶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 나 때문에 달라질 수 있음을.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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