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정 시인(한국작가회의 감사) |
다른 하나의 퍼포먼스가 있다. 누구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몸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우리 주변에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지 눈만 돌리면 그들이 왜 저렇게 몸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삼성해고자 김용희 씨가 강남역에서 목숨을 걸고 하고 있는 것이 바로 퍼포먼스다. 퍼포먼스는 사회적 약자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정치인들이 하는 퍼포먼스를 봤다. 단식을 해서 초췌한 모습도 보이고, 머리를 깎으면서 눈물을 보이며 억울하고 분한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퍼포먼스라는 것이 행위예술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정치인이 얼마나 답답하면 저런 행동을 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수긍하기 힘들 때가 많다.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분들이 무슨 이유가 있어 사회적 약자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쓰는 행위를 동원했을까.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고 억울한 일일까. 정말 정치인들의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스쳐갔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정치인들은 퍼포먼스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그걸 찾지 못한다면 정치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고민을 해 봐야 한다. 내가 왜 정치를 하고 있는가. 누구를 위해 정치를 해야 하는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가 다수의 국민을 위한 일인가. 답을 찾은 뒤에 퍼포먼스를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굳이 예술인들이 아닌 분들이 퍼포먼스를 해야 한다면 사회적 약자들이 했으면 좋겠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 안 돼서 할 수밖에 없어서 퍼포먼스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약자들의 모습을 보고 정치인들이 문제를 해결해 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퍼포먼스를 희화화한다면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결코 예술가의 행위예술을 정치인들이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퍼포먼스가 예술가의 전유물도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인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사회적 약자들이 정말 막다른 골목에서 더 이상 어디로 갈 수 없는 현실에서 하는 것이 퍼포먼스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수단인 퍼포먼스를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한다면 그 가치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의미도 퇴색할 수밖에 없다. 사방이 막힌 절박함에 목숨을 걸고 퍼포먼스라는 형식을 빌려 자신들의 현실을 토로하고 있는데 정치인들이 희화화해서야 되겠는가. /김희정 시인(한국작가회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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