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50년 전 그때 그날 -열두 살 소녀의 당찬 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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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50년 전 그때 그날 -열두 살 소녀의 당찬 그 날-

서옥천 / 수필가

  • 승인 2019-09-10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저기 순경 아저씨 온다."

느티나무 그늘에서 공기놀이하던 우리들은 친구의 외침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정말 순경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고 있다. 어디로 가는지 일어서서 지켜보고 있던 우리들을 향해 오고 있다. 호기심 반 무서움 반으로 엉거주춤 서 있는데 우리 오빠를 찾는다. 고만고만한 친구들이 손가락으로 얘네 오빠라고 동시에 나를 가리킨다.

오빠 이름을 확인하고 집안에 어른이 계신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니 집으로 함께 가잔다.

'제네 오빠 무슨 죄지었나 봐' 라는 소곤거림이 귓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정말 우리 오빠가 무슨 죄를 지었나? 절대로 그럴 오빠가 아닌데 그러면서도 나는 무슨 죄인처럼 양손을 다소곳이 모으고 앞장서서 걸었다. 새가슴처럼 작은 가슴을 콩닥거리며 낮은 담장을 지나 키 작은 사립문에 들어서자마자 바느질하고 계신 엄마를 불렀다.



밖을 내다보신 엄마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루도 없는 작은 뜨락에 내려선 엄마는 놀란 눈으로 '우리 아들 무슨 사고 났느냐'고 묻는다. 나는 엄마와 순경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몇 마디 나누더니 긴장했던 엄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엄마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고맙다는 말씀까지 하셨다.

오빠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면 소재지에 있는 지서에서 신원조회를 나온 것이다

경황이 없어 냉수 한 그릇도 대접 못 하고 처마 밑에서 몇 마디 나누곤 그 순경은 잠시 후 자전거를 타고 돌아갔다.

작은 시골 마을에 소문이 파다했다. 경찰이 다녀갔다는 것도 이야깃거리였으나 그보다도 어려운 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이다. 착실하더니만 공부도 잘했느냐고 동네 어른들께서 칭찬은 물론 자기 가족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주셨다. 집안에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 오빠도 엄마도 눈물을 글썽이며 좋아하셨다. 오빠는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곧장 회사에 들어갔다. 새벽밥을 먹고 출근하고 퇴근 후엔 석유 등잔불 아래서 밤늦도록 공부했다. 그 집념과 노력의 결심임이 분명했다.

합격 소식을 듣고 걱정 아닌 걱정이 생겼다. 임용후보자 등록을 하려면 호적등본과 신원 증명서가 필요했다. 본적지인 논산 ○○면사무소에 누군가 다녀와야 했다. 오빠는 직장에서 시간 내기가 여의치 않았다.

엄마도 급한 바느질 때문에 내가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큰댁은 명절 때 엄마 따라 다녀오긴 했지만 면사무소는 어디에 있는지, 잘 다녀올 수 있을지 겁부터 났다. 밤이 이슥하도록 엄마와 오빠의 설명을 듣고 머리에 담았다.

버스를 타려면 뿌연 먼지가 날리는 신작로까지 20여 분을 걸어야 했다. 버스를 타고 대전역까지 40분,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걸어서 20여 분, 시외버스로 면사무소까지 1시간 30분 정도, 염려와 달리 면사무소에 잘 도착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꼬마의 등장에 시선이 쏠렸다. 호적등본 떼러 왔다고 했다. 담당 직원이 호적부를 가져와 넘겨보더니 '오늘 다 할 수 없으니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했다. 오늘 가져가지 않으면 오빠의 합격이 취소될 텐데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놀란 기색으로 나를 이해시키려 했다.

조마조마 기다리고 계실 엄마와 오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시 오자면 차비도 부담이 되었다. 오늘 가져가지 못하면 우리 가족의 희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생각에 나는 울먹이다가 눈물을 쏟고야 말았다. 이번에는 직원이 당황한 듯했다. 밤늦게라도 오늘 꼭 가져가야 한다고 훌쩍거리며 말했다.

직원은 "집이 여기 아니냐?"고 묻었다. 우리 집은 대전보다 더 먼 시골이라고 말씀드렸다. 열 살 남짓 꼬마가 대전에서 혼자 왔다는 말에 다시 놀라는 눈치였다

오해가 풀렸다. 아버지가 막내인 우리 가족은 4명이었지만 큰집은 할머니를 비롯하여 큰아버지 내외분과 8남매 대가족이었다. 사위 며느리 손자들까지 함께 있으니 분량이 어마어마했다.

지금처럼 복사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불가능에 가깝다. 세대주 분리신고를 하지 않은 탓이다.

위 분과 상의하는 눈치였다. 늦더라도 오늘 해주기로 결론이 난 모양이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다정한 말이 어린 가슴속으로 울려 퍼졌다.

직원이 먹지를 대고 바삐 옮겨 쓰기 시작한다. 수고로움이 보였다. 나는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사이 서산 너머로 해가 숨어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서류를 받았다.

야무지다는 칭찬과 함께 잘 가라는 인사까지 받았다. 다소곳이 인사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기뻐할 엄마와 오빠 생각에 발걸음이 가볍다.

버스 타는 곳 앞에 담배 가게가 보였다. 집에 돌아갈 차비를 계산해보니 35원이 남았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겉 포장지가 누런 금빛인 "금관"을 골랐다. 가격을 물어보니 30원이라 했다. 한 갑을 사서 얼른 면사무소로 되들어갔다. 무슨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지만 고마움이 하늘을 찔렀다.

늦게까지 수고해 주신 분 앞에 놓고는 도망가다시피 나왔다.

이제 집에 갈 참이니 기분 좋은데 어둑어둑하니 조금 걱정도 되었다. 그래도 오늘 이렇게 오빠 심부름을 잘해서 다행이라 위안을 삼으니 걱정했던 마음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저녁이 지나 밤이 되었다. 어느 사이 동네 신작로 주막집 앞 버스 승강장이다.

그런데, 오빠와 엄마가 버스 출입문을 향하며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가. 울컥하고 울음이 나왔지만 억지로 참았다. 초저녁부터 노심초사하셨을 것이다. 서류를 건네 드리면서도 면사무소에서 울었던 이야긴 하지 않았다. 걱정하실 것이 틀림없었다. 담배 한 갑 샀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꾸중이 될지 칭찬이 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이제 오빠는 발령을 받으면 야간대학에 들어간다 했다. 나는 오매불망 중학교에 진학하게 될 것이다.

오빠는 엄마를 모시고, 엄마는 나의 손을 잡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함께 걷는 발걸음은 그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었다.

우리 남매가 안쓰러워 늘 눈물짓던 그 엄마는 머나먼 여행 떠나신 지 10년째 말씀 한 마디 없으시다. 푸르고 싱싱하던 오빠는 가정을 잘 일궈놓은 칠순을 넘긴 멋진 노신사가 되었으며 오빠의 취직이 잘못될까 조바심하며 눈물 쏟던 열두 살 꼬마는 어느 새 이순의 문턱을 넘었다.

그러구러 5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제 일처럼 너무나 생생하게 또렷이 기억나는 그때 그날이다. 그날이 있었기에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있었음은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서옥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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