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은 음력 팔월 보름을 일컫는 말로 가을의 한가운데 달이며 또한 팔월의 한가운데 날이라는 뜻을 지닌 연중의 으뜸인 명절로 친다고 한다.
추석은 애초 농공감사일(農功感謝日)로 송편을 빚어 조상에게 올려 차례를 지내고 성묘하는 것이 중요한 행사라 할 수 있다. 추석 전에 조상의 산소를 찾아 벌초를 하여 여름 동안 묘소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깎아주고, 추석날 아침에는 햇곡으로 빚은 송편과 각종 음식을 장만하여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고 조상의 산소를 찾아가 성묘를 하였다.
그래서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돌아가신 조상들이 고이 잠들어 계신 묘소를 찾아 우거진 풀과 잡초를 말끔하게 손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후손들이 모여 예초기와 낫 등을 이용하여 정성들여 벌초를 하곤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행하여지던 일이라 예초기와 낫 등을 사용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기계를 다룰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조상을 위한 벌초를 하다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안타까운 사연을 접할 때마다 나도 그럴 수 있겠구나 하고 몸서리가 처진다.
농업이 주였던 시절에는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가까운 곳에 형제나 친척들이 살았기에 조상의 무덤으로 가는 길은 멀리서도 눈에 뛸 만큼 잘 보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산에 오르는 일이 등산이나 약초를 캐러 가는 일 말고는 거의 없기 때문에 숲이 우거지고 옛길은 사라져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한참을 헤맨 끝에 겨우 조상의 묘를 찾을 수 있다.
예전에 식구들은 많고 먹기 살기 힘들어 개간하여 밭으로 경작한 곳이 하나둘 보다나은 삶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농촌에 남은 연세든 분들이 힘에 부쳐 농사일을 포기하거나 돌아가셔서 경작을 포기한 밭에는 나무들과 잡초들이 무성하고 칡덩굴로 뒤덮여 벌이나 뱀이 나올까봐 항상 조심해야 한다.
필자를 포함한 삼형제가 8월 24일(토)에 고향집으로 모여 형과 동생은 예초기를 점검하고 물과 먹을 것을 준비하여 동생과 나는 차로 20분 정도 가면 조헌 중봉의 묘소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의 입구에서 차를 멈춘 후 장화를 신고 수풀을 헤치며 20분 이상을 올라가야만 하는 큰 할머니가 잠들어 계시는 곳으로 향했다.
안내면 소재지를 지나자마자 대청호 상류지역의 우거진 숲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산과 담수로 가득 찬 것이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수채화의 풍경을 보는 것 같다.
도농마을에 도착하니 필자의 큰집은 형님내외분께서 돌아가시고 조카들은 인천등지로 나가 빈집만 덩그러니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70~80년대만 하더라도 큰집에 행사만 있으면 모두가 모여 왁자지껄하던 때가 있었고, 벌초도 종친들이 모여 함께 하고 식사도 같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가족 또는 사촌끼리 단출하게 모여 조상의 묘를 돌보고 있다.
수풀을 헤치며 도착한 큰 할머니 산소는 돌아가신지 80년이 넘은 오래된 묘소로 주변의 숲에 있는 칡덩굴과 우거진 수풀로 멀리서 보면 봉분의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주변에 사는 멧돼지가 먹이를 찾아 무덤주변에 자라고 있는 둥굴레 뿌리와 풀뿌리를 캐서 먹기 위해 올해도 어김없이 파헤쳐 놓았다. 공업고등학교를 나온 동생은 능숙한 솜씨로 예초기를 다루며 한 꺼풀 씩 우거진 산소에 자란 풀들을 깎아가며 구슬땀을 흘렸다.
기계에 서툰 나는 깎은 풀들과 칡덩굴을 갈퀴를 이용하여 무덤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옮기며 갈증에 목이 타면 가져간 시원한 물로 해결하곤 하였다.
어느덧 봉분이 환히 들어나고 주변이 산소의 모습을 보이면 할머니 산소의 벌초는 끝나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가 제단 앞에 술 한 잔과 안주를 간단히 차려놓고 벌초가 끝났음을 알리는 간단한 제례의 예를 올렸다.
'할머니의 은덕으로 우리 후손들은 잘 살고 있으니 지켜봐 주세요'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고 하산의 준비를 시작하며 벌초가 끝난 산소를 둘러보며 내년에도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다음으로 벌초할 장소인 고향 마을의 '전양골'이란 곳으로 아버지가 농사짓고 있는 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합장되어 있는 곳으로 차를 타고 향했다.
경북 구미에 살고 있는 형과 조카가 이미 산소의 벌초를 거의 마무리하는 단계에 있었다. 68년도에 돌아가신 할머니와 75년도 4월초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합장을 한 무덤은 오래되어 잔디는 별로 없고 잡초만 무성하여 세월이 흐르면 세력이 약한 잔디는 생명력이 강한 풀에 치어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육강식의 세계는 동물뿐 아니라 식물의 세계도 존재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마지막 벌초할 곳은 2005년도의 이른 봄날에 마늘밭 일을 하시다가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님의 산소이다. 지금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흐른다. 평생 농사일과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헌신만 하시다가 조금 살만하니까 자식들의 효도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아무런 유언도 없이 이승을 떠나셨다.
유명한 가수가 어머님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홍시'의 노래를 듣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
다른 산소에 비해 잔디가 잘 살아있고 잡초가 많지 않아 벌초하기엔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 무사히 아무런 안전사고 없이 벌초를 끝내고 점심식사를 하러 '원남'의 해장국식당으로 향했다. 모두들 긴장이 풀리고 나니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음식을 기다리며 다가올 추석이야기와 농사일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가윗날만 같아라.'라는 추석의 속담을 떠올리며 올해는 보다 뜻있고 풍성한 추석이 되도록 다짐하며 일하고 난 뒤에 먹는 점심은 꿀맛이었다.
오늘 벌초를 한 산소의 주인공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는 후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흐뭇하게 하늘나라에서 지켜볼 것만 같다.
요즘은 장례문화가 화장하여 납골당에 모시는 것이 일반화되어 벌초문화가 많이 사라지고 있지만 조상을 위하는 마음은 사라져서는 안 될 것이다. 조상이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고, 또한 후손이 있는 것이다. 벌초는 조상의 무덤을 기억하게 하는 실천의 장소요 조상을 위하는 효의 근본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벌초문화는 조상의 묘가 있는 한 계속되어야만 한다.
벌초를 끝낸 뿌듯한 마음을 서로에게 고마움으로 표현하며 추석연휴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각자 살고 있는 곳인 구미와 대전 그리고 안산을 향해 출발했다.
파란 하늘 저 멀리 떠 있는 뭉게구름도 말끔하게 벌초를 한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지 흐뭇하게 웃고 있는 듯 보였다.
염재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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