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당신도 피해자를 의심하는가…'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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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책] 당신도 피해자를 의심하는가…'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노지양 옮김│반비

  • 승인 2019-09-06 07:06
  • 박새롬 기자박새롬 기자
믿을수없는강간
 반비 제공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

T. 크리스천 밀러·켄 암스트롱 지음│노지양 옮김│반비



"성폭력 신고를 누가 하는지 아세요? 손님에게 돈을 받지 못한 매춘부들이 하는 겁니다." 경사는 대답했다. 브라운밀러는 경사의 태도가 법 집행기관에 뿌리내린 심각한 문제점을 시사한다고 보았다. -본문 중에서





성폭력 범죄는 피해자가 거짓말한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는 유일한 범죄다. 성폭력을 당했다고 말하는 순간, 수사기관부터 주변 지인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피해자의 말을 의심한다. 성폭력은 강력범죄 중 신고율이 가장 낮은 범죄다. 그래서 성폭력은 오랫동안 '피해자 없는 범죄'로 불려 왔다. 설령 피해자가 신고를 했다 해도 형사 입건까지 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재판까지 가더라도 피해자는 기소의 모든 과정에서 회의와 의심이 따라다니는 것을 견뎌야 한다.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법정에서 자신이 당한 성폭력의 자세한 내용을 공개해야 하며 자신과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는 범인을 보며 증언해야 한다.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는 '여성들은 강간당했다는 거짓말을 수시로 한다'는 여성 혐오적 생각이 만연한 사회에서, 수사재판기관이 얼마나 성폭력 피해자에게 회의적이며 적대적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도 알려준다.

2008년 8월,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임대 아파트에 홀로 사는 18세 여성 마리는 침입자에게 강간을 당했다고 신고했다. 경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마리는 강간 신고가 허위였다고 진술을 철회했다. 결국 마리는 허위 신고죄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약 3년 후, 타 지역에서 진범이 잡히고 나서야 마리의 강간 신고가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마리는 잘못된 성폭력 수사 관행의 피해자였다. 경찰은 사건 당시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을 알지 못한 채 피해자에게 여러 번의 진술을 강요한다. 반복된 진술에서 나온 사소한 모순을 의심했다. 또한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진술에 의존해 피해자를 취조하듯 신문했다. 결국 어린 소녀는 협박에 가까운 경찰들의 말에 겁에 질려 진술을 번복했던 것이다.

저널리스트인 T. 크리스천 밀러와 켄 암스트롱은 방대한 서면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해 독자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전한다. 성폭력을 묘사할 때는 가급적 불필요한 세부 사항을 밝히는 것을 줄이고 강간범이 피해자들에게 준 공포를 전달하는 데만 집중했다. 피해자들의 의견을 반영해 용어 사용에도 고심했다. 피해자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과 성폭력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사건 묘사의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탐사보도의 승리"라는 평가가 따라왔다. 이 책의 밑바탕이 된 르포르타주 「An Unbelievable Story of Rape」는 2016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마리의 무죄를 밝혀내는 데는 두 여성 형사의 활약이 있었다. 그들은 성범죄 피해자들에게 나타날 수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보통 경찰들이 걸리기 쉬운 '피해자다움'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또한 원칙에 입각해 피해자의 말을 경청하고, 사건의 핵심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섣불리 허위라고 단정 짓지 않았다. 정보는 공유하고,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아주 작은 단서 하나로 몇 년에 걸쳐 강간을 저질러오던 범인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지만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한국의 성폭력 피해자들 역시 피해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 피해자다움이라는 잣대로 고통받고 무고죄로 기소당할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는 현실을 견뎌야 한다. 수사기관, 사법기관 그리고 언론 등이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마리가 당했던 일은 언제까지고 일어난다. 책 제목의 '믿을 수 없는 강간'이 누군가의 강간 피해를 믿을 수 없음이 아닌, 강간 피해자를 믿지 않는 부조리한 시대가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세상이 돼야 한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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