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며느리를 반반씩 쏙 빼닮은 친손자의 모습에서 새삼 "씨도둑은 못한다"는 속담이 떠올랐다. 이는 집안에서 지녀 온 내력은 아무리 해도 없앨 수 없다는 말이다. 아들은 할아버지인 나에게 손자의 작명(作名)을 부탁했다.
허나 과거처럼 다산(多産)하는 시절이 아니다. 또한 집안의 항렬(行列)에 의거하여 이름을 짓는 세월도 지난 지 오래다. 또한 기껏 자녀를 하나 내지 많아봤자 둘 밖에 안 낳는 즈음이기에 "아버지인 네가 직명하거라. 대신 내가 지명하는 이름은 참고만 하길 바란다"며 다섯 가지 이름을 알려줬다.
현재의 필자 이름은 경석(卿碩)이다. '벼슬하여 크게 될 사람'이란 뜻이다. 하지만 벼슬은커녕 하루하루 먹고살기에도 급급한 저잣거리의 필부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벼슬'은 어떤 기관이나 직장 따위에서 일정한 직위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지만, 관아(官衙)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에 더 방점을 찍는다. 지금에 견주면 공직(公職)이란 셈이다.
필자의 최초 이름은 선(善)이었다. '착하게 살라'고 아버지께서 대충 지으셨지 싶다. 그러다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직전, 아버지의 친구분께서 우리 집을 찾으셨다. 어떤 산에서 도를 닦는다고 했다.
"네 아들 이름이 뭐냐? 선(洪善)이라고? 단명할 수니 당장 바꿔!" 그리하여 즉석에서 작명된 이름이 현재의 '경석'이다. 마침맞게(?) 그때까지 필자는 호적 등재조차 못 하고 있던 터였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무관심이 도드라지는 대목이다.
아무튼 그렇게 작명한 뒤 호적을 정리하고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파죽지세(破竹之勢)의 1등을 질주했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4학년 2학기 때, 다크호스 급우가 전학을 왔다. 그리곤 내처 불변의 필자 1등 자리를 단숨에 강탈했다.
이른바 '금수저'의 어쩌면 당연한 승리였다. 작금 '금수저'(부모의 재력과 능력이 너무 좋아 아무런 노력과 고생을 하지 않음에도 풍족함을 즐길 수 있는 자녀들을 지칭), '흙수저'(부모의 능력이나 형편이 넉넉지 못한 어려운 상황에 경제적인 도움을 전혀 못 받고 있는 자녀를 지칭하는 신조어이며, '금수저'와는 전혀 상반되는 개념) 얘기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어릴 적부터 금수저 출신은 100미터 달리기 경주에 있어서도 우리네 흙수저보다 최소한 50미터 앞에서 달리기 경주의 준비를 마치고 있다는 걸 간파했다. 도무지 이길 수 없는 게임이란 의미다.
설상가상 가세까지 기울어 '소년가장'이란 멍에까지 짊어져야 했다. 빌어먹을! 또래들은 멋진 교복 입고 중학교에 갈 적에 고작 역전 바닥에서 냄새 지독한 남의 구두나 닦아야 했으니...
어쨌거나 이러한 지난 시절의 아픔과 장애물까지 있었기에 주'장애물이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면'이라는 말처럼 오늘날 필자는 자식농사에 성공했다. 세 번 째 저서 출간계약이 임박한 것 역시 필자의 이름처럼 어떤 벼슬의 만결(晩結)이 아닐까 싶다.
9월 2일자 조선일보 오피니언 면에 [순도99.99와 99.99999999의 차이]라는 글이 실렸다. 우리의 경제를 책임졌던 반도체 산업에 있어 순도99.99와 99.99999999의 반도체 재료 산업의 차이는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라는 KAIST 김정호 교수의 당연한 지적이었다.
그래서 첨언하는데 언제나 당당한 아이, 그야말로 순도 '99.99999999'를 자랑하는 손자로 무럭무럭 자라나길 기도한다.
홍경석 / 수필가 & '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 저자
**덧붙이는 말=[장애물이 긍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독수리가 더 빨리, 더 쉽게 날기 위해 극복해야 할 유일한 장애물은 '공기'다. 그러나 공기를 모두 없앤 다음 진공 상태에서 날게 하면, 그 즉시 땅바닥으로 떨어져 아예 날 수 없게 된다. 공기는 저항이 되는 동시에 비행을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삶에 있어서도 장애물이 성공의 조건이다." (존 맥스웰)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