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중국 내 독립운동의 흐름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계열과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계열의 양대 산맥으로 형성된다.
그중 사회주의계열의 대표적 단체가 김원봉이 주도적으로 창설하고 이끈 의열단이다.
지난 7월 9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조선의열단 10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약산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손자병법을 탐독하는 등 영특하고 유난히 민족의식이 강했다고 한다. 밀양공립보통학교 시절 일왕 생일날 친구들과 일장기를 변소에 던져버렸다는 에피소드로 그의 성향을 짐작할 만하다.
자신의 스승이자 고모부인 백민 황상규가 창설자로 참여한 대한광복회의 무장투쟁에 자극받아 19세이던 1916년 조국독립의 꿈을 품고 중국 텐진으로 건너갔다. 몇 년 후 국내의 3.1운동을 일제가 잔혹하게 진압하는 것을 목격하고 더 이상 평화적 방법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자각한다.
그러던 중 1919년 9월 2일, 서울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65세의 강우규(姜宇奎) 의사가 부임하는 사이토(齋藤實) 총독의 마차에 수류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자극받아 밀양 등지에서 망명해 온 동지들과 11월 9일 만주 길림성에서 비밀결사체인 의열단을 조직했다.
황상규를 지도자로 하여 신흥무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김원봉, 윤세주 등 13명의 단원으로 구성됐고 22세의 김원봉이 단장에 추대됐다.
‘의열단(義烈團)’이라는 이름은 공약 제1조의 핵심 개념인 '정의(正義)‘와 ’맹렬(猛烈)'의 뒷 두 글자를 조합한 것이다.
의열단은 암살과 파괴공작을 주 임무로 ‘5파괴’와 ‘7가살(七可殺)’을 목표로 했다. 5파괴의 대상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주요 식민통치기관이며, 7가살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 주 조선 일본군수뇌, 친일파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 토호 등이었다.
그 후 단원은 강령을 쓴 신채호 선생을 비롯해 민족시인 이육사, 민족음악가 정율성, 김상옥, 김시현, 나석주, 김익상, 김지섭, 박재혁, 최수봉, 이종암 의사 등 쟁쟁한 독립투사들이 망라된다.
의열단은 김원봉의 지휘로 1920년부터 1926년까지 6년 여 동안 무려 23차례의 암살, 파괴공작을 실행해 일제를 공포에 떨게 했다.
그중 중요한 몇 가지를 보겠다.
의열단 최초의 의거는 1920년 9월 14일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투척사건’이다. 부산출신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 (橋本秀平)에게 폭탄을 던진 사건으로 서장에게 중상을 입혔으나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서장은 그 후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의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 1921년 5월 27일 단식으로 옥사하고 말았다.
‘김시현 사건’은 흔히 ‘황옥경부사건’이라고도 한다. 밀양폭탄사건으로 1년간 복역하고 나온 김시현이 1923년 국내에서 대대적인 거사를 기획하며,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황옥 경부의 협조로 중국 텐진에서 무기 등을 반입하며 일어난 사건이다.
황옥은 종로경찰서 폭탄투척범(김상옥 의사) 검거를 위한 출장길에 톈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항일운동가담을 서약하고, 김시현과 함께 대량의 폭탄과 권총 등을 은밀히 서울로 반입한다.
그러나 동행한 김재진의 밀고로 체포되어 각각 10년의 징역형을 언도받는데 복역 중 황옥은 1년 후 가출옥한다. 이것이 영화 ‘밀정’의 스토리로 메인 캐릭터 이정출(송강호 분)이 바로 황옥이다.
그런데 황옥이 김시현의 동지인지 전략상 투입된 경찰인지가 논란이다. 학계에선 후자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1923년 1월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 1924년 1월 김지섭 의사의 도꾜 왕궁 앞 ‘이중교(二重橋) 폭탄투척사건’, 1926년 12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경 7명을 사살한 뒤 자결한 ‘나석주 의사 의거’ 등도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영웅적 의거였다.
그러나 나석주 의거 이후 몇 차례 공작이 더 있었지만 잦은 실패와 일제의 강경한 탄압으로 활동이 위축된 데다 자금부족 등으로 의열단의 무장투쟁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김원봉은 의열단장을 비롯해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역임한 대표적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다.
당시 일제가 내건 현상금이 김구 주석의 배에 가까웠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상을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광복을 맞아 귀국한 조국에서 남로당주도의 파업연루를 이유로 악질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뺨을 맞는 수모를 당한다.
그 후 1948년 좌우합작 남북협상단의 일원으로 월북했다가 귀환하지 않고 북한정권의 고위직으로 참여했다. 미귀의 이유는 노덕술 등 친일파들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 때문인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결국 위대한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월북이후의 행적으로 인해 금기시 되어 지금껏 국민들에겐 이름조차 생소했다.
그러나 그는 북에서조차 1958년 김일성의 대대적인 연안파 숙청 때 제거되었다는 전언이다. 조국광복을 위해 몸 바쳐 싸운 독립영웅이 광복된 조국에서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인해 비참한 종말을 맞고 만 것이다.
잊혀있던 그의 존재는 몇 년 전부터 영화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5년 개봉된 천만관객 영화 ‘암살’에서 연기자 조승우로 처음 소개됐고, 그 뒤 ‘밀정’에서 ‘정채산’이라는 이름으로 이병헌이 그를 연기했다.
최근에는 얼마 전 종영한 MBC드라마 ‘이몽’에서 유지태가 주연으로 연기했고, 들리는 얘기로 그의 스토리가 KBS1 주말사극으로 광복절에 맞춰 준비 중이라 했는데 어쩐지 소식이 없다.
올해 건국 100주년을 맞아 북한정권참여라는 논란 속에서도 비운의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적지 않은 비중으로 조명되고 있다. 물론 논란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장준문/ 조각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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