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유가족 제공 |
여기에 본보가 보도했던 충주 출신의 이강래 선생과 함께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청양 출신의 '서승효 선생'에 대한 재조명도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다. 어려운 시대 속에서 충청인의 의지, 한글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노고를 수면 위로 끌어내야 한다는 이유다. <본보 1월 21일·22일자 5면 보도>
연아 서승효 선생(1882년 9월 22일~1964년 9월 11일)은 청양에서 태어난 충청인이다. 1910년 국권이 무너지자 중국 상해 임시정부로 떠났고, 이후 만주 신흥군관학교에서 광복에 힘쓸 청년들을 길러냈다. 1920년 고국으로 돌아온 서승효 선생은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 기자로 은신해 평생을 신문사에서 편집기자로 일했다.
서승효 선생은 기자가 된 후 박봉의 월급을 국외로 나가는 독립투사의 여비와 조선어학회 회비로 내놓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43년 옥고를 치를 때도 조선어학회와 독립운동가를 후원했다는 명목이 주였다.
연아 선생의 며느리인 김명자(80·조선어학회 선열유족회)씨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아버님과 가족들은 현재 서울 현대미술관 옆 덕성여중 뒤편에서 살았다.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남편의 월급봉투 한 번 못 받아 본 기억이 없다고 늘 이야기 하셨다"며 "집 바로 뒷담이 조선어학회가 모이던 곳이었는데, 이들 중 몇몇 분은 늘 우리 집에서 점심을 드셨다"고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조선어학회와 독립운동가들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서승효 선생의 대쪽같은 일화는 또 있다.
김명자 씨는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형 선생과 아버님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함께한 가까운 사이였다. 해방이 된 이후 이시형 부통령이 상공부 자리를 비워놨으니 6개월만 하라. 그래야 자식들도 고생 안 한다며 권유했지만, 아버님은 반쪽 자리 정부에서 그것도 이승만 밑에서 장관을 할 수 없다며 일언 지하에 거절했다"고 설명했다.
조선어학회 선열은 총 33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2014년 제막된 한말글 수호기념탑 명단에는 35인으로 표기돼 있다. 이극로(의령) 선생과 정열모(보은) 선생 등 북으로 건너간 조선어학회 회원의 업적은 인정하되, 선열 숫자에서는 배제한 모습이다.
서승효 선생의 유가족의 바람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 일이다.
35인 조선어학회 일원 가운데 23명은 서훈을 받았지만, 12명은 각각의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한 상태다. 서승효 선생도 이중 한 명이다.
김명자 씨는 "아버님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1943년 옥살이를 하셨다. 당시 아버님이 연로하셨는데, 감옥서 늑막염에 걸렸다. 상태가 위독해지자 출소해 집에서 요양을 하셨다"며 "이 부분이 지금까지 발목을 잡고 있다. 조선어학회 일원으로 활동한 모든 기록이 남아있는데도 보훈처는 재판을 받지 않고 나왔기 때문에 서훈 대상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수년째 유공자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편 청양 출신의 서승효 선생에 대한 지역 기록도 전무하다. 중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면서 가족들이 중국과 서울로 이주한 탓도 있지만, 묘나 생가지가 보존되지 못한 이유도 있다.
김명자 씨는 "생전 아버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이념이 꼿꼿하고 타협이 없는 분이셨다.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운동은 안 하셨지만, 아버님의 활동은 후대가 알아야 할 중요한 활동이다"고 전했다.
이해미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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