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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는 태도들의 정류장이고 그 정류장에는 분노도 슬픔도 사랑도 미래도 과거도 이따금 정차했으나 그중 어느 것도 영원히 멈추지는 않았다. 정류장에 남겨질 수 있는 것은 정류장뿐이었다." - 「싱크홀」 중에서
수록작 「싱크홀」 속 백진과 은하는 서로를 특별하게 여긴다. 운영하던 쇼핑몰을 그만두고 사업을 철수한 백진과 오랜 시간 이어진 폭력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버텨 온 은하. 은하는 거짓말을 통해 자신을 방어하고 진실을 잊어버린다. 타인을 향하지 못한 분노를 내면화해 왜곡된 방식으로 자기를 지킨다. 은하와 백진의 대화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은 채 부유하며 일시적 감정들을 받아 안은 채 떠다닌다. 언제 빠질지 모를 불안의 공간인 싱크홀은 인물이 처한 상황과 내면의 풍경을 암시하는 공간의 압도적 이미지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전달한다.
작가 최영건은 첫 소설집인 이 책에서 부서지고 몰락하는 인간 군상을 깊게 탐구한다. 「플라스틱들」, 「감과 비」, 「더위 속의 잠」은 각각 고부사이, 늙은 카페 소유주와 젊은 아르바이트생, 친척 할아버지와 그의 집에 얹혀사는 대학생 여성의 갈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흔한 세대갈등이 아니다. 누가 봐도 다른 사람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지만 사회적 통념이 감추고 있는 잠복된 갈등이다. 인간 심연의 고독과 어둠이 함께 끌어올려진다.
작가는 「쥐」에서 화려한 저택을 채운 가족의 고독과 우울을, 「물결 벌레」에서는 타자 없이 자기 존재와 자기 감각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을 통해 주체의 상대성을 드러낸다. 표제작이자 마지막으로 수록된 「수초 수조」는 앞선 소설들 속 불안과 불행과 폭력이 제거된 이상적 세계를 보여준다. 자연스럽고 평화로우며 안정적인 인공의 세계는 역으로 현실의 불완전함을 느끼게 한다.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공통된 심해인 동시에, 우울과 고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현대인의 심해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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