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드리안이 작품 활동하던 당시, 화가 대부분 치열한 예술의식과 혼을 불살랐다. 다양한 경향을 접하고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실험과 창출을 모색했다. 누구의 작품을 보더라도 지속적인 변화가 담겨있다. 몬드리안도 다르지 않다. 물체의 개별성을 초월한 참모습을 표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구성요소를 단순화하다 보니, 수직선과 수평선만 사용하기에 이른다. 기하학적 언어와 원색의 단순한 조화로 최고의 순수함을 창조하려 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20세기 미술과 건축 및 각종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기하학적 추상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와 함께 거론되는 것이 음악적 추상이다. 대표적인 작가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 ~ 1944, 러시아 화가)이다. 현대 회화에서 처음으로 순수추상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구체성을 띠는 대상물은 그 구체성 때문에 본질의 전달이 차단된다는 생각에 대상, 즉 형태를 없애려 노력한다. 음악이 소리만으로 교감을 갖는 것처럼 색채만으로 아름다움을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리와 색채 간의 교감을 추구한다. 작품과 감상자의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음악, 철학, 미술 이론을 심도 있게 연구한 탓이겠지만, 이러한 생각은 우연히 찾아온다. 어느 날 외출 후 돌아와 보니 작업실에 못 보던 아름다운 그림이 있지 않은가. 자세히 보니 자신이 그리던 그림이 거꾸로 놓여 있는 것이었다. 형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서정적 추상, 뜨거운 추상이라고도 한다. 계획된 의도 보다는 자신의 감흥이나 감정, 느낌이 이끄는 대로 자유롭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연에 더 치중하였던 화가로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 ~ 1956, 미국 화가)이 있다.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거나 쏟아붓고, 캔버스 위에서 춤추듯 붓을 흔들기도 하였다. 격렬하고 뜨거운 느낌으로 화면이 채워진다.
19세기 초에 형성된 다다이즘 명칭은 여러 가지 설이 전한다. 1916년 취리히 볼테르 카바레에 모인 젊은 작가들이 임의로 사전을 펼쳐 첫 번째 나오는 단어를 선택했다 한다. 젊은 예술가와 반전주의자들이 자주 모임을 했는데, 어느 날 사전에 끼워져 있던 종이 자르는 칼이 '다다'라는 단어를 가리키고 있어 이를 채택했다고도 한다. 어느 것이든 자신들의 활동에 부합되는 방법이요, 단어라 생각했다. 그때까지 전해오던 미학적 규범을 타파하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 노력했다. 하찮은 잡동사니를 소재로 반예술적 작품을 구현했으나, 오히려 세련되고 아름다운 미학적 효과를 거둔 것으로 회자 되고 있다. 남성용 변기에 서명한 『샘』이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마르셀 뒤샹((Henri Robert Marcel Duchamp, 1887 ~ 1968, 프랑스 화가)이 대표적인 다다이즘 작가이다. 모나리자의 엽서에 수염을 그려 넣은 『L.H.O.O.Q』, 평범한 나무의자에 자전거 바퀴를 올려놓은 『자전거 바퀴 Bicyle Wheel』등 일상 속의 오브제를 작품으로 탈바꿈시켜 많은 화두를 던지며, 주의를 환기시킨다. 동시에 현대미술의 방향을 제시한다. 천재성, 창조성에 관한 맹신을 무너뜨리고 진정한 예술의 자유 구현에 앞장선다.
자기 주도적 삶을 영위하려 하는 사람은 우연을 싫어한다.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희망은 희망일뿐, 세상일이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기에, 은근히 행운에 기대는지 모른다. 복권 한번 사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행운은 의지나 노력과 별 상관없이 일어나는 좋은 일로, 우연의 하나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 필연이다. 논리적 필연과 객관적 필연으로 나누기도 한다. 우연은 인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논리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우연은 과연 그저 우연일까? 원인 없이 그저 일어나는 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무원인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필연이 우연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라 하기도 한다. 우연과 필연이 반대 개념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우연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작가의 의도대로 작품은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의도 외에 바탕이 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란 말을 많이 쓴다. 사회과학적으로 연구하여 비슷한 결과를 얻은 경우도 있다. 예술에서와같이 세상사 역시 우연이 더 많은 빛을 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율은 제각각이더라도 우리의 삶은 우연과 필연, 의지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결정력이나 중요성은 다르지 않다. 아무리 미세하더라도 의지 없는 우연이나 필연은 없다.
성숙한 사회는 개인의 영광과 성공만 추구하지 않는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것인가? 고민하는 것이다. 국가 또한, 다르지 않다. 행운을 불러오는 우연이나 필연이 더 많이 일어날 환경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국가 사회가 우연이나 필연을 관리하면 어떨까? 작지만 강한 의지를 불태울 용기와 희망을 주어야 마땅하지 않은가?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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