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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아이돌과 팬픽은 중고등학생 문화의 한 흐름이었다. 아이돌 헤어스타일을 따라 칼머리가 유행했고 '우리 오빠에게 여성 애인은 절대 안된다'는 마음으로 아이돌 그룹 내 커플을 정해 연애소설을 쓰는게 유행했다. 동시에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동성을 사랑하는 문화가 거세게 번져갔다. 그들은 아이돌 그룹 A군과 B군이 서로 사랑하고 섹스하는 이야기를 지어내고 읽으며,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닌 모든 섹슈얼한 정보들을 배웠다. 그리고, 사랑이 있었다. 여학생들은 서로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사랑보다 멀고 우정보다 가까웠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강렬하게.
전작 <가만한 나날>에서 사회초년생들이 통과하는 인생의 '첫' 순간을 섬세하게 그리며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작가는 <항구의 사랑>에서 또 한 번 잊을 수 없는 첫 번째 순간을 선보인다. 사랑의 한복판에 있었기에 제대로 알 수 없었던, 몰랐기에 더 열렬했던 10대 시절의 첫사랑 이야기다.
소설은 목포를 배경으로 주인공 '나'에게 가장 영향을 줬던 세 여자와의 일들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쓰여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칼머리를 하고 힙합바지를 입고 '남자처럼' 건들거리는 어린 시절 친구 '인희', 유행에 휩쓸려 레즈비언인 척하는 애들 때문에 '진짜 레즈비언'들이 힘들어진다고 말하는 친구 '규인', 그리고 '내'가 단 한 번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여자 '민선 선배'가 그들이다.
대학생이 된 뒤, 주인공은 대학교가 기이할 정도로 이성애에 대한 찬양과 관심이 집중돼 있는 곳이기에 본능적으로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일들은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영 그 시절을 묻어 두고 살 것 같던 어느 날, 별안간 찾아온 과거의 친구가 '나'에게 묻는다.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때 그건 다 뭐였을까?"
내내 묻어 두었던 한 시절이 결국 쓸 수밖에 없는 이야기로 탄생하기까지의 시간은 여자아이가 자라는 시간이다. 소설은 여자아이가 스스로의 욕망을 살피고,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기까지 길고 깊은 고민의 과정을 다룬다. 목포를 떠난 후 '나'는 서울로 와서 사귀게 된 대학 친구들과 애인이 된 남자 선배에게 자신이 여자와 사랑에 빠졌던 일에 대해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나'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그 모든 것을 잊은 듯 덮어 버린 채 어른이 되었는지. 왜 이제야 그 이야기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지.
소설은 '여자아이가 작가가 되기까지'라는 문학적 성장 서사에 '나는 누구이고, 누구와 사랑할 것인가' 하는 정체성 탐구 서사를 더한다. 동시에 여자가 느끼는 성적 욕망,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도 눙치지 않고 담담하게 고백한다. 사랑을 복기하며 자라난 사람의 말간 목소리가 독자의 감정을 파도치게 한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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