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약 2년을 시골에서 자랐다. 조부와 외조부의 집이 차로 20여분 거리에 있어 두 집을 자유롭게 오가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농사를 짓는 외조부모님은 필자를 많이 챙겨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장이 서는 날이면 어린 손자를 데리고 나가 시장 구경을 시켜주시고 맛있는 간식거리도 사주시곤 했다. 도로가 많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 외조부 집으로 가는 길에 큰 천이 하나 있었는데 버스가 물을 가로질러 가는 게 어린나이에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지금은 교량으로 그곳을 통과해 들어가지만 그 장소만 지나가면 아직도 기억이 생생히 날 정도로 어릴 적 나만의 익스트림(?)이었다. 여느 시골아이가 그렇듯 또래 아이들과 다니며 위험한 물건도 만들고 장난도 많이 치고 다녔다. 동네 아이들과 사냥을 다닌다며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고 다녔다. 역시나 아이들의 활솜씨에 사냥감이 되어줄 동물이나 새들은 없었다. 그렇게 허탕을 치고 나면 추수가 끝난 논에서 화살을 하늘로 날리며 놀곤 했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들어가자 돌아가신 외조부가 위험한 물건이라며 빼앗아갔다. 어린마음에 그게 어찌나 서운하던지.. 지금 생각해보면 딸이 맡긴 외손자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큰일 난다 싶으셨던 거다. 또 소를 키우셨던 외조부는 소여물을 주는 창고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셨다. 볏짚을 자르던 작두가 있었는데 그걸 만지다 혹여나 사고가 날까 싶으셨던 거다. 아마 유년시절 시골에서 보낸 2년의 시간이 없었다면 조부모님과의 추억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외갓집 친척들과 만나면 안주 삼아 어릴 적 이야기를 하곤 한다.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자식들을 위해 한 평생을 일하다 돌아가신 외조부는 가족 중 유일하게 현충원에 안장되신 분이다.
가족들의 자랑인 할아버지! 하늘에서 할머니와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평소에 자주 해드리지 못한 말이 있는데요. 할아버지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이성희 미디어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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