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라는 글이다. 이 시를 새삼 톺아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제는 한 줄의 댓글로 마음에 큰 생채기를 입었다. 모 시민기자 단체카톡방이 근저였다. 필자가 저서 홍보를 과도하게 했다는 의미인지 하여간 "불편하니 책 광고 좀 그만하라."는 노골적 댓글이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동안 올렸던 글과 사진을 모조리 삭제했다. 너무도 힘들게 출간한 저서(著書)였다. 때문에 몇 번 언급한 것이었거늘 그게 맘에 안 든다고 모두가 보고 있는 단톡방에 버젓이 항의의 글을 올리다니…….
차라리 개인적 문자로 그와 연관된 얘길 했더라면 그렇게까지 마음에 상처는 안 받았을 것이었다. 사족이겠지만 저서를 출간한 작가는 홍보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그건 자신의 글을 출간해 준 출판사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이며 예의인 까닭이다.
마음에 큰 상처가 나자 불현듯 '이제 나도 꼰대의 반열에 든 것일까?'라는 자문자답의 늪에 함몰되는 느낌까지 해일로 다가왔다. 아무튼 그 댓글은 정호승 시인의 [수선화에게]라는 시에서의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는 대목을 동무 삼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했다.
남북이 분단되는 바람에 언제부턴가 '동무'라는 호칭이 사라졌다. 그러나 이는 '늘 친하게 어울리는 사람'이란 의미의 고운 우리말이다. '어떤 일을 짝이 되어 함께 하는 사람'이란 뜻까지 지니고 있기에 실은 자주 쓰고 볼 일이다.
6월 4일자 조선일보 '윤희영의 News English' 칼럼에 "한국에서 '꼰대'란 무엇인가"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에 따르면 영국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정의하길 '거들먹거리는 나이 든 사람'이라고 했단다.
또한 '아랫사람이 커피를 갖다 주지 않으면 짜증이 난다'에 이어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에겐 보복을 가한다'는 부분까지 추가됐다. 한데 이는 과연 사실일까? 이와 연관된 글을 잠시 더 살펴본다.
= "어원이 불확실한 현대어(modern word of uncertain origin)인 '꼰대'는 아랫사람들의 절대적 복종을 바라는(expect unquestioning obedience) 나이 든 남성을 주로 지칭한다. 이들은 남을 비난하는 데는 잽싸면서(be quick to criticize others) 자기 잘못은 결코 인정하지(admit his own mistake) 않는다.(retaliate against them)." =
시민기자로 입문할 당시, 필자의 나이는 불과(?) 40대 중반이었다. 따라서 그때는 중간(中間)에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필자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꼰대'의 반열에 올랐다. 기자는 자아도취적 직장 상사, 고압적인 아저씨, 부패한 정치인도 대표적 꼰대들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어 세월호 사고 당시 선원 대부분은 도망가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는 지시를 따랐던 학생 304명은 몰사하면서 불거진 맹종(blind obedience)의 위험성도 꼰대 거부감을 부추겼다고 첨언했다.
떠올리기는 싫지만 세월호 참사 당시, 달아나지 않고 학생들을 구하다 목숨까지 잃은 선장과 선원들이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우뚝한 영웅(英雄=hero)이 돼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기자의 지적처럼 '꼰대 정신'에 함몰되는 바람에 그 영광의 직위(職位)마저 뿌리치는 우(愚)를 범했다.
어쨌거나 댓글로 입은 상심(傷心)의 상쇄(相殺)는 다른 작가 모임 단톡방에서 이뤄졌다. 사실대로 이실직고했더니 위로와 격려의 댓글이 빠른 피드백(feedback)으로 양산(量産)되어 도착했다.
"남이 잘 되는 걸 못 견뎌 하는 사람이라며 치부하고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는 변함없이 홍 작가님을 응원합니다!" 지금 시간은 새벽 2시.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다.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는 정호승 시인의 주장처럼 이 글을 마치는 대로 밖에 나갈 참이다. 비를 맞으며 나도 모르는 사이 자칫 생성되었을 수도 있는 그릇된 '꼰대 정신'을 시원한 빗줄기에 모두 씻어내고자 한다.
홍경석 / 수필가 & '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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