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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매일 불경 독송과 기도를 열심히 하시는 아버님께서 며느리인 필자에게 물으신다.
"어떻게 죽는 게 잘 죽는 걸까요?" 아버님께 되물었다.
"고통 없이 자는 듯 죽는 거지"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경험이 없는 우리는 죽음을 대부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죽는 것도 겁나고 다시 태어나는 것도 겁이 난다"
아버님처럼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죽음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윤회까지 걱정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죽고 나면 다시 태어나고, 이생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어지는 원리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한다. 삶을 잘 산 사람이라면 사실 죽어도 아쉬울 게 없을 것이다. 또한 두려움도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잘 산다는 것이 곧 잘 죽는 방법이 되는 게 아닌가.
아버님께서는 6.25를 겪고 나서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울 때 힘든 삶을 살아온 세대이다. 그때 그들은 어려운 경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며 달려오신 분들이다. 그러다 보니 가족에게 다정다감하지 못했던 세대였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그래서 대하기 어려웠던 아버지들이었다.
아버님께서는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아버님 역시 아들인 남편과도 그리 살가운 사이는 아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칭찬보다는 모자란 점을 나무라며 자식들이 뭐든지 더 잘해내길 바라던 어른이셨다. 그래서 자식들과 무언지 모르게 보이지 않는 벽이 있음에 나이가 들어 자식과 가까이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신다.
고령화가 되면서 잘 죽는다는 것은 시대적 화두일 것이다. 죽음도 준비가 필요하다. 톨스토이는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한탄을 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는데 대부분 죽음에 대한 준비가 소홀하다.
잘 사는 방법을 아는 것만큼 잘 죽는 방법을 아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죽음의 의미를 알면 삶을 아끼고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잘 쓰여진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 온다'고 했다.
얼마 전 남편은 고교 총동문회에 갔다 오더니 한 선배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선배 중에 은행장을 하시고 칠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은행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이 있는데 총동문회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시어 동문회가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후원을 하며 후배들에게 2차를 꼭 사시며 하시는 말이 있다고 했다.
"내가 70이 넘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니?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좋은 인맥들이 많으니 너무 힘들면 찾아오너라. 너희들에게 필요한 조언과 인맥들을 연결해 주마. 나를 잘 써라"라고 하시며 후배들에게 베풀고 나눔을 하신다고 한다. 그런 그 선배가 존경스럽다고 했다.
재산이나 업적은 잊히고 없어지는 반면에 사람은 남는다. 결국 잘 죽는다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눠서 사람들을 얻고 남기는 것은 아닐지?
죽음은 모든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든다. 잘 죽는 법은 죽음을 배우려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잘 죽는다는 명제는 아버님처럼 나이가 든 분이나 죽음을 눈앞에 둔 중환자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과제이자 삶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매 순간 인생을 정리하면서 오늘이 마지막인 듯 살아간다면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준비된 마지막 여행이 되지 않을까?
김소영/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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