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톡] 알밤 한 톨의 순애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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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톡] 알밤 한 톨의 순애보 사랑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 승인 2019-06-07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옆 동에 사는 딸을 데리고 선산의 조상님께 성묘를 떠났다. 성묘라고는 하지만 먼저 가서 선산을 지키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어른거려 재촉하여 가는 발걸음이었다. 같이 가는 딸애 곁에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5살짜리 꼬마 외손녀 다인이가 제 어미 손을 놓지 않고 있다.사위가 운전하는 차에 재잘거리는 외손녀 이야기를 들어가며 추석날 고향으로 가는 길은 예전 같지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고향 가는 길은 같았건만 곁에 있는 사람이 달라서였을까! 곁을 따르던 그림자가 아니어서 그랬을까! 전 같으면 낯설지 않은 아내의 음성에 파묻혀 이런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었을 터인데…….

운전으로 수고하는 사위에게 미안했다. 계속 재잘거려 졸릴 새가 없게 하는 신종 인간 내비 우리 다인이에게 핫도그 하나라도 사 주고 싶었다. 공주 휴게소에서 쉬어가자 했다. 셋이서 우유 한 병식씩을 마시고 우리 재롱꾼 다인이에게는 호두과자 한 봉을 사 주었다. 잠시 후에 생각지도 않았던 다인이(외손녀)가 다니는 어린이집 원장님을 만났다. 원장님도 친정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조금 이따가 보니 어린이집 원장님이 작은 종이 박스 하나를 들고 왔다. 담긴 것은 녹차 2병이었다. 차 한 잔이라도 내가 먼저 대접하고 싶었는데 순서가 뒤바뀐 것 같아 미안했다.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차를 마신 후 차 담았던 빈 박스를 다인이가 손에 쥐고 광시 숙모님 댁까지 갔다. 가서 보니 사촌여동생 4자매가 부부동반에 애들까지 데리고 왔다. 인천 사는 10살짜리 3학년 우진이를 만나 다인이가 금방 친해져서 잘 놀고 있다. 우진이가 다인이 좋아하는 줄넘기 시범을 보이며 친동생 이상으로 챙겨주며 잘 놀고 있다. 노는 모습이 동심세계를 부럽게 할 만큼 재미있고 즐겁게 보였다.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벌써 정이 듬뿍 들은 것 같았다. 정감 있게 대해주는 우진이에게 '오빠, 오빠'부르며 따르니까 남다른 정감에 흥이 나는 듯했다. 두 어린이는 금세 정이 들어 시간이 아쉬울 정도 잘 놀고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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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 이미지 뱅크
우진이가 불룩한 호주머니에서 알밤 두 톨을 꺼냈다. 5살짜리 꼬마 다인이가 사랑스럽고 예쁘니까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우진이 호주머니의 알밤은 신풍 밤실 할머니가 주신 것인데 어느 겨를에 벌써 다인이 호주머니로 자리 이동을 한 것이었다. 윤기가 조르르 흐르는 알밤 두 톨이 다인이의 것이 되었다. 아마도 아끼는 마음으로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을 다인이가 사랑스럽고 예쁘니까 준 것 같았다.

서로의 일정이 바빠서 2시간 정도 놀다가 다인이는 금치리 할머니 댁으로 가고, 우진이는 인천 저의 집으로 갔다. 금치리 할머니 댁에서 하룻밤을 잤다. 애지중지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놀던 알밤 2톨도 어린이집 원장님이 주신, 차를 담았던 종이박스에 담아 놓았다.

아침 먹고 한나절쯤 되는 시간이었다. 왠지 출출하여 군것질을 하고 싶은데 적당한 먹을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곁을 보니 알밤 두 톨이 담겨 있는 종이 박스가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어제 다인이가 가지고 놀던 것이 분명한데 싫증이 나서 내동댕이친 것 같았다. 출출한 김에 곁에 있는 알밤 두 톨 중 하나를 깨물어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잠시 후에 옆방에서 놀고 있던 다인이가 장난감을 가지러 왔다가 그걸 보았다. 제 밤을 누가 두 쪽 냈다고 뒹굴며 울기 시작했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은 그치질 않았다. 떼를 쓰고 뒹굴면서 질러대는 고함소리는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광고 효과 100%인 울음소리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할아버지가 그랬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잘못했다고 심통쟁이한테 사과하며 빌었다. 울음이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별것도 아닌 밤 한 톨 가지고 뭘 그러느냐고 했다. 다인이는 들은 척도 않고 울기만 했다. 이런 저런 제안을 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사태 수습이 안 되어 현금 1만 원짜리를 주며 달래도 보았다. 그것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알밤은 그냥 알밤이 아니라는 식으로 한 마디 쏘아붙였다. < 우진이 오빠가 나를 좋아해서 준 건데.> 하며 달래도 막무가내다. 별것도 아닌 밤 한 톨을 깨고 나는 진땀이 났다.

이 나이가 되도록 밤 한 톨 깨고 그렇게 빌고 사정해 본 적은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했다. 알밤 속에 숨어 있는 소중한 사연을 알지도 못하고 한 톨의 밤을 두 쪽으로 만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도 소중한 순정의 사랑 징표를 이 할아버지가 깨친 격이 되고 말았다.

비록 5살, 10살짜리 어린이의 순수 사랑이 숨 쉬고 있는 알밤이었지만 거기에 깃들어 있는 사랑은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알밤 한 톨로 오래오래 보존하려는 순애보 같은 사랑은 누가 뭐라 해도 끔찍한 사랑임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는 젊은 남녀들이 결혼할 때 사랑의 증표로 예물 반지를 교환한다. 금반지를 비롯해서 다이아반지 등 고가의 값이 나가는 보석 반지를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끼워 준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쉽게 만나고 어렵지 않게 헤어지는 것이 다반사이다.

현대의 기성세대 어른들은 밤 한 톨을 깼다고 울어대는 다인이의 순애보 사랑을 배웠으면 한다. 진정 소중한 것은 잊지 않고 지켜가지려는 5살짜리 다인이 마음을 신주처럼 모시고 살았으면 한다.

아니, 세상 다 바뀌어도 소중한 신뢰와 순수의 사랑만은 일상적인 것으로 속화되지 않는 방부제 사랑으로 간직했으면 한다.

부디 소멸되지 않고 승화·계승된 고갱이로 길이길이 남아 주기를 바란다.

세상 다하는 날까지 변하지 않는 순수로 순애보 사랑의 꽃을 피웠으면 한다. 삭막해져 가는 현실에 그 아름다운 신기루 효과가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밤 한 톨도 그 의미를 소중히 무겁게 여기는 5살짜리 꼬마의 마음,

보석반지도 그 사랑도 가볍게 버리는 약삭빠른 현대 어른들의 마음'

어린이는 어른의 스승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알밤 한 톨에 담겨 있는 믿음과 사랑을 깨뜨리지 않으려는 그 울음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 나비효과로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남상선 수필가, 대전가정법원 조정위원

남상선210-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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