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오디세이]느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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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오디세이]느림의 미학

양성광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 승인 2019-06-03 08:12
  • 윤희진 기자윤희진 기자
양성광 이사장
양성광 이사장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배우는 한국말이 '빨리빨리'라는 얘기가 있다. 빨리라는 말에 담긴 역동성은 전쟁의 폐허 속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이제는 조급증이 폐해로 남아 사회 전반에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 가장 뼈아픈 것은 남보다 빨라야 살아남는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과정보다는 결과만 중시하는 풍토다.

어릴 적 대전역 앞 버스정류장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버스가 선 다음 사람들이 내리고 타도 바로 출발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10여 분을 훌쩍 넘겨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가끔은 지나가던 사람과 차창 밖으로 손 인사하다가 아예 내려 수다 떨어도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유리창 넘어 세상도 그림 속 풍경인 듯 무심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뀌었는데 냉큼 출발하지 않으면 바로 뒤에서 빵하고 경적을 울리는 세상이다. 나부터도 한창 일할 땐 뭐가 그리 급하다고 느려터진 프린터를 탓하며 인쇄 종이를 잡아당기고픈 충동을 느낀 적이 여러 번이다. 서두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데 괜히 마음만 바빠 실수하게 되고, 만회하려 허둥대다 일이 더 꼬여버린 적도 많다. 만사 제쳐놓고 반나절 푹 쉬고 나면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기도 하는데 말이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북쪽의 마르카 숲에 있는 '미래 도서관'은 2014년 이 숲에 나무 1000그루를 심고 100년 뒤인 2114년에 이 나무들로 종이책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매년 한 명씩 100명의 작가를 선정해 원고를 기증받고 있다. 올해는 우리나라 소설가 ‘한강’이 다섯 번째 작가로 선정돼 얼마 전 이 숲에서 조촐한 원고 기증행사가 치러졌다. 100년 후 출간될 한강의 원고는 '사랑하는 아들에게'라는 제목 이외는 내용이나 분량, 형식이 일체 비공개된다고 한다.



의학과 생명공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 수명 100세 시대가 곧 온다고는 하나, 이 행사에 참석했던 200여 명의 오슬로 시민은 아무도 이 책의 모습과 내용도 모르는 채 죽어갈 것이다. 기다림이 끝나도 결국은 종이책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모임에 참석한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사람이 나무 밑동이나 낙엽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한강과 노르웨이 소녀가 원고의 일부를 한국어와 영어, 노르웨이어로 낭독하는 것을 듣는 모습이 한 장의 풍경화처럼 머릿속에 펼쳐진다. 한강의 원고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나이테 속에 스며들어 이미 책이 된 듯하다. 사람은 마치 2114년이 되어 종이책을 들고 있는 것처럼 여유롭다. 어릴 적 버스에서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던 정지 화면과 시나브로 오버랩 된다.

45억 년이라는 지구의 나이를 생각하면 우리의 생은 찰나와도 같은데, 아등바등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했던 아쉬운 순간들도 지나고 나니 그다지 아쉬울 것도 없고 이제는 무엇이 아쉬웠는지 기억마저도 희미하다.

사람이 죽고 나면 시간이 멈출까? 내가 죽으면 적어도 나의 시간은 멈추겠지. 그러면 내가 죽기 전 단 하루만 남았다면 이 하루를 어떻게 써야 할까? 10년이라면, 100년이라면 달라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루보다 100년이 더 힘들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사람들 대부분을 떠나보낸 후 그 많은 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저런 상념을 하다 보니 역시 사람은 제 명을 모르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를 더 살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 하루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재수 없으면 앞으로 100년은 더 살 수 있으니 모든 일을 오늘 하루에 끝내려고 조급해할 것도 없다.

아인슈타인은 '빠르게 운동하는 물체에서의 시간은 느려진다'고 했다. 오늘 하루 바쁘게 내 몸을 움직이다 보면 나의 시간은 느려질 것이니 급하게 서두를 이유가 없다. 느긋하게 하루를 잘 보내고, 그다음 날이 다시 주어지면 또 그렇게 잘 살면 된다.

양성광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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