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광 이사장 |
어릴 적 대전역 앞 버스정류장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버스가 선 다음 사람들이 내리고 타도 바로 출발하지 않고 마냥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10여 분을 훌쩍 넘겨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가끔은 지나가던 사람과 차창 밖으로 손 인사하다가 아예 내려 수다 떨어도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유리창 넘어 세상도 그림 속 풍경인 듯 무심하게 서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뀌었는데 냉큼 출발하지 않으면 바로 뒤에서 빵하고 경적을 울리는 세상이다. 나부터도 한창 일할 땐 뭐가 그리 급하다고 느려터진 프린터를 탓하며 인쇄 종이를 잡아당기고픈 충동을 느낀 적이 여러 번이다. 서두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닌데 괜히 마음만 바빠 실수하게 되고, 만회하려 허둥대다 일이 더 꼬여버린 적도 많다. 만사 제쳐놓고 반나절 푹 쉬고 나면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기도 하는데 말이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북쪽의 마르카 숲에 있는 '미래 도서관'은 2014년 이 숲에 나무 1000그루를 심고 100년 뒤인 2114년에 이 나무들로 종이책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매년 한 명씩 100명의 작가를 선정해 원고를 기증받고 있다. 올해는 우리나라 소설가 ‘한강’이 다섯 번째 작가로 선정돼 얼마 전 이 숲에서 조촐한 원고 기증행사가 치러졌다. 100년 후 출간될 한강의 원고는 '사랑하는 아들에게'라는 제목 이외는 내용이나 분량, 형식이 일체 비공개된다고 한다.
의학과 생명공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평균 수명 100세 시대가 곧 온다고는 하나, 이 행사에 참석했던 200여 명의 오슬로 시민은 아무도 이 책의 모습과 내용도 모르는 채 죽어갈 것이다. 기다림이 끝나도 결국은 종이책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모임에 참석한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사람이 나무 밑동이나 낙엽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한강과 노르웨이 소녀가 원고의 일부를 한국어와 영어, 노르웨이어로 낭독하는 것을 듣는 모습이 한 장의 풍경화처럼 머릿속에 펼쳐진다. 한강의 원고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나이테 속에 스며들어 이미 책이 된 듯하다. 사람은 마치 2114년이 되어 종이책을 들고 있는 것처럼 여유롭다. 어릴 적 버스에서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던 정지 화면과 시나브로 오버랩 된다.
45억 년이라는 지구의 나이를 생각하면 우리의 생은 찰나와도 같은데, 아등바등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부질없게 느껴진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했던 아쉬운 순간들도 지나고 나니 그다지 아쉬울 것도 없고 이제는 무엇이 아쉬웠는지 기억마저도 희미하다.
사람이 죽고 나면 시간이 멈출까? 내가 죽으면 적어도 나의 시간은 멈추겠지. 그러면 내가 죽기 전 단 하루만 남았다면 이 하루를 어떻게 써야 할까? 10년이라면, 100년이라면 달라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하루보다 100년이 더 힘들 수도 있겠다. 사랑하는 사람들 대부분을 떠나보낸 후 그 많은 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저런 상념을 하다 보니 역시 사람은 제 명을 모르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를 더 살지 모르기 때문에 오늘 하루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잘 살 수 있는 것이다. 재수 없으면 앞으로 100년은 더 살 수 있으니 모든 일을 오늘 하루에 끝내려고 조급해할 것도 없다.
아인슈타인은 '빠르게 운동하는 물체에서의 시간은 느려진다'고 했다. 오늘 하루 바쁘게 내 몸을 움직이다 보면 나의 시간은 느려질 것이니 급하게 서두를 이유가 없다. 느긋하게 하루를 잘 보내고, 그다음 날이 다시 주어지면 또 그렇게 잘 살면 된다.
양성광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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