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이 짓거리가 전 분야에 걸쳐 반복된다. 누구보다 스승으로, 선비로, 문인으로 - 인정받고 싶어 안달나고 뒤틀린 자들이 정직을 입에 담는 꼴이 우습다. 저 하나 정직하게 못 보면서 말이다. 그들에게선 늘 쉬어빠진 인정욕구만 읽힌다.
요즘 누가 진정으로 인격이 고매하고 영혼이 우월해 선생이라더냐. 그저 자기 전공의 전문 영역 안에서 지적으로 열어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충실히 제공하면 그만이다. 거추장스런 품위와 보잘 것 없는 권위라도 묵묵히 감사하고 감당하고 감내할 줄 아는 게, 가르치는 걸로 밥벌어 먹고사는 자의 진짜 정직일 것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조선식 계급주의 세계관을 비판한답시고, '사'를 피토하며 규탄하고 '농공상'을 나대어 옹호하는 사람 중에 자신이 '농공상' 어디에도 정확하게 속하지 않는, 아니 되려 본인의 직업적 정체성은 '사'에 가까운 유형군의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빈약한, 그래서 내심 더욱 공고하게 채우고 싶은 선비 정체성을, 선비 까는 얘기 듣고 싶어하는 '농공상'의 비위를 맞춰줌으로써 거기에서 확인받는다는 점이다. 결국 그들이 자기기만으로 얻어내는 거짓 자존감이란 특별한 선비 대접을 받고픈 동어반복적 사농공상 계급의식이란 얘기다.
물론 '사'의 룰로 정면승부하진 않는다. 나는 그게 정의로운 내부비판으로 보이기보다 부정직하고 비겁한 태도로 보인다. 불리할 때마다 재빨리 '농공상'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들의 비위에 맞게 저 죽일 놈의 선비들을 보라며 손가락질을 하고는 '농공상' 여러분이 최고라고 끊임없이 대리로 떠들어줌으로써 '농공상'에게 박수받는 것으로 제 내공의 부족함을 감추고 열등감을 덜어내고 자존감을 세운다. '사'의 세계에서 제대로 평가받기는 두렵기 때문에 그 세계를 대충 쓸모없고 퇴행되고 부패한 것으로 함부로 치부하고는 간편하게 진실을 회피한다.
목소리를 높일 땐 다른 지식인들에게 크게 호통치는 참 지식인이자 천하를 호령하는 신 사상가였다가,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라도 들으면 갑자기 불쌍한 제야의 약자이자 졸보이자 한풀이꾼이자 무식한 백정이 되어 자기 같은 사람은 아무렇게나 말해도 된단다. 뻔뻔하고 편리한 무책임이다.
죽음과 이데올로기와 역사와 전쟁을 논하는 것만이 지식인다운 것이고, 스치운 사랑 타령이나 하는 것은 가볍고 얄팍하다는 식으로 떠들 요량이라면 뭐하러 남 보고 선비라며 까대는 걸까. 자신의 기호를 탐색하고 그에 맞는 훌륭한 음식을 선보이는 식당을 부러 찾아가 미식을 즐기는 일을 죄다 중산층의 속물주의로 조롱하고 폄훼할 것이라면 사농공상 비판은 왜 하며 개인주의와 상업의 중요성은 왜 그렇게 강조하는가.
개인이라는 개념의 발명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로 그것이 생활에 감각되기 시작한 것 역시 역사적으로 상공업의 발달 이후이다. 사랑에 대한 오랜 사색은 개인의 내면과 밀접하다. 자유 연애와 개인의 탄생은 근대의 한 쌍이 아닌가. 사랑 타령은 개인의 것이다.
커피와 와인은 개인의 기호 대상이요, 맛집은 자영업을 구성하는 대표 주자이다. 그러나 맛집이나 다니는 족속이라느니, 커피와 와인을 마시며 음식 사진이나 올리는 살 만한 중산층 나으리들이라느니, 비웃으며 누구보다 사농공상의 계급의식에 지배되어 계신 선비님 선비님 우리 선비님. 개인주의도 사회적으로 주창할 줄밖에 모르는 선비님 선비님 우리 선비님.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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