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런 마음을 전할 새도 없이 한 학기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쉬움 가득했지만 앞으로 마주칠 일 없겠다 싶었다. 그런데 하늘이 나를 도왔던 건지 그해 방학, 채플에서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난 우연을 인연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직진했다. 같이 들었던 수업 성적에 대한 질문도, 방학 때 왜 학교에 남아있는지와 같은 근황도 아닌 나와 밥 먹지 않겠냐는 본론으로.
그 친구는 웃었다. 당황한 듯 보였지만 여느 때처럼 환하게. 그러고는 알겠다고 덧붙였다. 난 뛸 듯이 기쁜 마음을 숨겼지만 아마 얼굴에 전부 드러났을 거다. 그날 저녁 우린 약속 시간을 정했고, 그 일주일을 난 꿈속에 사는 듯 보냈다.
그게 다였다. 약속 날짜가 거의 다가왔을 즈음 바쁘다는 말로 시간을 미뤘고, 다시 주겠다던 연락은 결국 오지 않았다. 돌려 말했지만 거절, 명백한 실연이었다. 친구들은 매달릴 필요 없다며 나를 위로했고 난 그 위로의 말들을 멍하니 들었다. 대부분 괜찮다는 말이었지만 그 끝엔 그 친구에 대한 타박이 함께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괜히 나 때문에 이유에도 없는 욕을 그 친구가 먹고 있다는 걸.
그 친구는 그저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렸다. 또 내 호감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다양한 욕도 들어야 했다. 물론 직접 들었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점이 내 마음을 더 찝찝하게 했다. 단순히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감정이 누군가에게, 그것도 가장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상대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게 겁이 났다.
대부분은 나의 행동을 용기라고 표현했다. 결과와 무관하게 좋은 시도라며 치켜세웠다. 더불어 다시 한 번 더 연락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도 들었다. 이왕 용기 낸 거 한 번 더 내보라고. 그런데 난 그 용기가 어쩐지 폭력처럼 느껴졌다. 흔히 말하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도, 용기 있는 자가 사랑을 쟁취한다는 말도 모두 결론적인 말일뿐이었다. 그사이에 찍힐 나무가 받을 상처와 갑작스런 용기를 감당해야 하는 누군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물론 나의 섣부른 예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용기와 폭력, 그 미묘한 한 끗 차이의 경계가 어쩐지 모호했다. 여튼 난 그 친구에 대한 어떤 말도 하기를 그만뒀다. 그리고 더이상 누군가의 연애담을 들으며 이 일을 떠올리지 않는다. 오히려 이따금, 데이트 폭력에 대한 뉴스를 보며 이 일을 떠올릴 뿐.
유지은 기자 yooje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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