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다시보는 대전형무소 100년] 5. 산내 희생자 유족을 만나다
아들은 아버지보다 곱절의 인생을 살았고, 여동생은 희미해진 오라버니의 사진을 보며 그리움 담아 시를 쓴다.
이유도 모른 채 끌려간 가족들, 이들의 슬픔을 누가 알아줄까. 대전 산내 골령골 희생자 유족회원들은 오늘도 눈물을 훔치며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우갑제씨와 아버지 우대식씨 |
우갑제 씨는 “아버지는 당시 31살이셨다. 조선상호은행에 다닐 정도로 수재였다. 당시 나라에서 보도연맹 가입을 권유했는데 아버지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단체라고 믿고 가입하셨던 것 같다. 나라를 위한 순수한 마음이었을 텐데, 이렇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날 것이라곤 상상도 못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전에 도착해 보도연맹을 교육 시킨다는 명목으로 가입자들을 극장으로 집합시켰다. 그리고 우갑제 씨 아버지를 비롯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젊은 청년들을 대전형무소에 수감했다.
우갑제 씨는 “아버지는 대전형무소 수감 된 지 열흘 만에 산내 골령골로 끌려갔다. 정치적 활동을 한 것도 아닌데, 할 것 같다는 사실상의 추측만으로 끌려간 거다. 너무 억울하게,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신순란씨와 오빠 신석호씨 |
신순란 씨는 “야학으로 주민들의 눈을 깨워주던 큰오빠가 정치범으로 몰려 붙잡혀 갔다. 끌려간 지 1년 만에 희생 당했다”고 말했다.
이어 “수감 된 오빠를 보러 어머니가 면회를 간 적이 있다. 당시 교도소는 유리벽이 없이 창살만 있어서 손을 잡아볼 수는 있었는데 온 몸이 상처투성이인 오빠가 계속 뒷짐을 지고 있길래 어머니가 의아했던 모양이야. 어머니는 네 손 한 번 잡아보지 않고는 집에 가지 않겠다 말했고, 끝까지 손 내밀기를 피하던 오빠가 결국 어머니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글쎄, 손 마디마디가 다 파여서… 전기고문을 당했는지 성한 손가락 하나 없더라”며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오빠가 잡혀간 날 이후로 신순란 씨의 가족은 웃음도 대화도 사라진 채 희생자의 유족이 되어야만 했다.
우갑제씨와 신순란 씨의 바람은 한가지다. 유골을 찾아 제대로 된 봉분을 세운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지만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갑제 씨는 “여전히 빨갱이니까 죽었겠지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알 수 있게 골령골 학살과 관련해 숨겨진 진실이 하루빨리 드러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신순란 씨는 “유골을 찾는다는 것은 가능성이 희박한 이야기다. 전체적으로 발굴하고 화장해서 우리들이 죽기 전에 추모비라도 세워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유진 기자 1226yu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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