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령 제86호. 명치 43년 조선총독부령 제11호 중 일부, 즉 왼쪽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개정한다. 대정8년(1919) 5월 8일자로 공주감옥소 분감 항목 다음에 다음의 1개 조항을 덧붙인다. 대전감옥 (위치는) 앞과 같은 충청남도 대전. |
한국교정사 연혁에도 5월 8일 대전감옥소 설치가 명시돼 있다. 이후 10월 9일 개청했다. |
위키백과 화면 캡처. |
[3.1운동 100년 다시보는 대전형무소 100년] 4. 대전형무소 출발 5월 8일
우리는 대전형무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대전 중구 목동 일대에 세워진 일제식 교도소라는 것, 일제 강점기부터 민주화 운동까지 약 67년 간 운영 됐다는 것, 안창호, 여운형, 김창숙 등 주요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정치범을 가둔 수감소였다는 것 외에는 잘 알지 못한다.
대전형무소 터는 오래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역사의 증인인 망루와 우물은 사실상 폐허처럼 우리 곁에 남아지만, 여전히 무관심 속에서 그렇게 잊히고 있다.
어쩌면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기에 대전형무소와 관련한 단편적인 역사만을 알음알음 구전으로 전해 들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대전형무소와 관련해 새로운 정설이 제기됐다. 바로 개청일이다.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대전형무소를 검색하면 대부분 5월 1일로 개청일로 표기하고 있다. 심지어 현재 법무부 교정본부 대전지방교정청 연혁에도 1919년 5월 1일을 형무소의 첫 개소일로 표기한 바 있다. 대전지방교정청은 최근 홈페이지 연혁을 수정했다.
중도일보는 대전형무소 100주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전지역 역사 관계자들로부터 "대전형무소의 정확한 개청일은 1일이 아닌 8일"이라고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됐다. 그리고 생각보다 쉽게 증거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일본의 통치정책이 담겨 있는 조선총독부 관보를 살펴보면 조선총독부령 제86호 '다이쇼(1912~1925) 팔년 오월 入日(8일)'이라고 대전감옥소의 정확한 개소일을 명시하고 있다.
또 1987년 6월 발행된 한국교정사에도 1919년 5월 8일 대전감옥소를 설치하고, 그해 10월 19일 개청해 수감자를 들였다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정확한 근거 자료를 쉽고 빠르게 확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오랜 세월 그 누구도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으려 하지 않았던 셈이다.
대전 역사 관련 전문가는 “일제강점기의 역사라는 이유로 우리는 대전형무소의 역사를 세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첫 시작부터 제대로 알아야만 우리의 역사를 아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전문가들은 대전형무소의 개청일을 제대로 표기하고 대전형무소와 관련된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의지다. 또 최근 발굴된 취사장터와 담장과 관련해서도 복터가 아니라 하루빨리 복원과 보존을 통해 대전형무소의 의미를 유지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개청일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대전형무소의 이야기는 많다.
1926년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조선인 뿐만 아니라 일본인 24명, 중국인 1명도 수감돼 있었고, 1928년 연와조(벽돌구조)의 사상범 감방을 70평 확장하기도 했다. 1933년엔 심각한 정원초과로 증설계획이 발표됐고, 사상범들의 교화 목적으로 양계업을 실시하기도 했다. 장기수를 주로 수감한 대전형무소는 개청 20년 만에 수감자가 1310명에 달하기도 했다.
대전형무소는 비록 조선인을 탄압하기 위한 감옥소였지만, 100년의 시간 동안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곳이다. 역사의 오기를 바로잡는 것은 후대가 해야 할 일이다.
이해미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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