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상황에서 유엔(UN)이 최근 베네수엘라 상황에 대한 실사(實査)를 바탕으로 작성한 보고서가 공개됐다. AFP통신이 입수해 공개한 유엔의 '인도주의적 지원 우선순위 검토'라는 45쪽짜리 보고서에는 마두로 정권하의 처참한 베네수엘라 실상을 전하는 수치들이 가득했다. 한때 '사회주의 지상낙원'으로 알려졌던 베네수엘라 상황은 현재 최빈국 수준을 넘어 '국가 기능의 총체적 실패에 따른 재난의 만성화'로 요약된다. "베네수엘라 국민이 가장 기본적인 치안·의료 서비스는 물론 백신과 의약품, 물, 전기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인도주의적 대 위기'에 처했다."는 게 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베네수엘라는 사실상 국가 전체가 재난 지역이었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베네수엘라 국민 94%가 빈민층이고, 60%는 극빈층으로 분류됐다. 빈곤층은 소득과 서비스 접근성 등 13개 지표로 경제 상황을 평가해 100점 만점에서 25점 이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고, 극빈층은 빈곤층 중에서도 '식량을 살 돈이 없어 자다가 배고픔에 잠이 깰 정도'인 사람들을 말한다. 보고서는 "국민의 24%인 700만 명은 긴급한 인도주의적 지원이 없으면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했다.
식량난이 이어지면서 베네수엘라 국민은 만성적인 영양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외신들은 앞서 "최근 수년간 베네수엘라 국민 평균 몸무게가 11㎏이 줄었다."고 보도했는데, 이번 유엔 보고서는 "국민이 고기와 채소를 적절히 섭취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우유 소비량은 2014년부터 3년 새 77%가 감소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370만 명이 영양실조 상태이고, 특히 5세 이하 아동의 경우 최소 22%가 만성적 영양실조를 앓고 있다고 했다.
의료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의사와 의약품이 부족해 신장병이나 파킨슨병 등을 앓는 환자 30만 명이 당장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 보고서는 "폐결핵·홍역 등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며 "깨끗한 물이 부족해 B형 간염 환자가 급증하는 추세"라고 했다.
식량난과 의료난에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상황이 장기화하자 국외로 탈출하는 사람은 갈수록 늘고 있다. 2014년 이후 국외로 빠져나간 인구는 국민의 10%가 넘는 340만 명에 이르렀다. 최근엔 하루 평균 5000여 명이 베네수엘라를 떠나고 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이렇게 국외로 빠져나가는 사람은 그래도 괜찮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특히 전문가들이 많이 탈출해 위기를 더 심화시키는 측면이 있다. 예컨대 베네수엘라 전체 의사의 33%에 달하는 2만2,000여 명이 해외로 이주해 의료난은 심각한 상황이다.
근현대사에 찾기 힘든 속도로 악화된 베네수엘라 사태를 두고 전문가들은 "차베스-마두로 정권으로 이어진 좌파 포퓰리즘의 문제가 곯아 터진 결과"라고 지적한다. 마두로 정권의 전신(前身)인 우고 차베스 집권기(1999~2013년)만 해도 베네수엘라는 석유 부국(富國)으로 군림하며 호시절을 누렸다.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바탕으로 국영 석유 기업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좌파 포퓰리즘 정책에 쏟아부었다. 빈민층에 무상으로 아파트를 지어주고 무상 교육·의료까지 시행하면서도 2000년대에 5~18%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 이르는 고유가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도 모자라 "미주 대륙에 반미(反美) 좌파 전선을 구축하겠다."며 쿠바·니카라과 등 좌파 정권에 헐값으로 석유를 퍼줬다.
하지만 2014년 저유가 시대가 도래하면서 경제는 급속히 무너졌다. 마두로는 국민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 퍼주기식 포퓰리즘 정책을 거두지 않았다. 부족한 돈은 정부가 마구 찍어내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렇게 시중에 풀린 돈은 초인플레이션으로 민생을 완전히 파탄 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베네수엘라 위기는 이미 구소련이 붕괴하던 수준을 넘어섰다."고 했다.
베네수엘라 원유는 초중질유(超重質油)로 타르와 같은 점성(粘性)이 강해 나프타나 휘발유 등 희석액과 혼합하지 않으면 송유관을 통한 운반이나 수출이 불가능하다. 수출 가능한 원유로 정제하려면 미국 등 글로벌 석유 기업들의 기술과 자본이 필요하다. 베네수엘라 석유 산업이 급성장하게 된 계기도 1990년대 시장 개방과 함께 외국 자본과 기술을 유치했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1998년엔 하루 생산량이 300만 배럴을 웃돌기도 했다.
그런데 1999년 차베스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2003년 국영 석유 기업 PDVSA에서 파업이 일어나자 차베스는 이를 명분으로 자신을 반대하던 전문가들을 모두 해고하고, 비전문가들인 자신의 측근을 요직에 앉혔다. 게다가 2007년엔 미국 석유 기업인 엑손모빌과 코노코필립스 등 외국계 석유 회사의 자산을 강제로 몰수해 국영회사 PDVSA에 합병시켰다. 그러자 엑손모빌 등 글로벌 석유 기업들은 베네수엘라에서 철수해 버렸다.
해외 자본과 기술이 떠난 자리를 메우려면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베네수엘라는 정반대로 달렸다. 사회주의 정부는 석유 수출 수익을 석유 산업에 재투자하기보다 선심성 무상복지 정책에 쏟아부었다. 차베스는 석유 수출을 통해 축적된 국가 자산의 50% 이상을 무상교육·무상의료·연금제도 등 복지 정책에 투입했다. 그런 바람에 노후한 장비와 설비 교체 등은 이뤄지지 않았고, 기술 발전 역시 정체를 면치 못했다. 전문 인력의 이탈도 심했다.
우리의 무상복지 정책도 이 나라를 닮아가는 형상으로 치닫고 있다. 청년수당, 일자리수당, 교복 무상 제공, 무상급식, 부익부 빈익빈의 심화가 걱정스럽다. 고등학교 무상급식도 선심은 중앙정부가 써놓고 비용은 반반 내지, 교육청에 떠넘기는 형국이다. 교육청이 무슨 돈이 있는가? 경제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다. 고위직에 임명되기 위해 거치는 청문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한결같이 상상도 못한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이 있는데 그 과정이 통과의례라 그대로 임명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 분야의 문외한인 낙하산 인사로 자리를 메우면 그 조직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반문해 본다. 최소한 기본적인 인품과 자질과 전문적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나라라고 베네수엘라 꼴 당하지 말란 법 있는가? 많이 걱정스럽다.
문희봉(시인·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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