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는 나무와 숲을 함께 본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일상에서 나무도 보고 숲을 보는 것이 왜 어렵냐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나무와 숲을 같이 보는 것처럼, 부분과 전체를 함께 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무와 숲을 함께 보지 못하고 어쩌면 나무만을 보기도 하고, 또 숲만을 보는 것 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자기 자신과 사회의 공동체라는 부분과 전체의 개념에서, 개인 또는 공동체라는 두 개의 나무와 숲과 같은 관계에서 모두를 고려하는 것이 쉽지도 않지만, 모두를 고려할 때 오는 단기적이고 상대적인 불이익이나 불공정 등을 경험하게 되면서 우리는 어는 한쪽만을 보는 것에 익숙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무와 숲을 모두 보는 것이 필요함에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나무를 보려고 하거나, 또 숲을 보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보는 나무와 숲은 언제나처럼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그 나무와 숲이 항상 언제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큰 고려의 대상이 아니고 당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나무를 보려고도 하고 숲을 보려고도 하면서, 새삼 나무와 숲의 존재를 인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우리는 나무와 숲이라는 것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찾고 얻으려는 노력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분과 전체, 개인과 사회와 같은 서로 긴밀히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또 별개의 존재로 인식되는 것으로부터,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따른 가치 판단을 하고 평가를 통해 어떤 결정이나 결과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나무와 숲을 보려고 하는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나무와 숲을 보는 것은 그냥 항상 존재하는 나무와 숲에 대해 단순히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사유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이유와 목적에 부합하거나 부합하지 않은 결과도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곁에 항상 존재하고 있고 존재해야 하는 당연한 존재로서의 나무와 숲을 보는 것과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고 보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이나 이유나 의도를 가지고 나무와 숲을 본다고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과연 '나무와 숲을 어떻게 바라 볼 것인가?'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개개의 나무를 바라보는 것도 정말 다양한 방식이 존재할 수 있고, 숲을 보는 방식도 너무나 다양합니다. 나무와 나무에 대한 비교와 평가와 판단도 역시 다를 수 있으며, 숲을 바라보는 관점과 어떤 지역의 숲과 다른 지역의 숲을 비교하고 평가하고 인식하는 방식도 너무나 다양합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면, 우리가 나무와 숲을 바라본다고 하는 것 역시 물음에 또 다른 물음이 연속되는 마치 풀리지 않는 퍼즐을 푸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나무나 숲을 보는 것을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그냥 당연히 우리 곁에 존재해야만 하는 나무와 숲이 아니라 '왜 나무를 보아야 하고 숲을 보아야 하는 가?'에 대한 본래의 의문과 취지와 이유에 대한 답을 스스로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상황은 우리가 원했던 상황도 아니고, 포기한다고 해서 나무와 숲을 보려고 했던 이유나 목적이 해결된 것이 아닌 상태로 우리는 다시 나무와 숲이라는 미로에서 벗어 날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부분과 전체에 대한 문제는 사실 정해진 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 개인의 문제나 소규모 집단이나 단체의 문제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나 국가의 문제를 고려할 때, 어느 것을 우선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답 역시 정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개인의 권리가 어느 것보다도 우선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또 때로는 개인의 권리보다는 우리 사회와 공동체의 정의가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개인의 권리나 소규모 집단이나 단체의 문제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단체 또는 집단이 가진 문제와 반드시 일치할 수도 없습니다. 나 개인의 권리가 다른 사람의 권리와 충돌할 수도 있고,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떤 규정이나 법규를 만들거나 고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에게는 소위 '보편적 가치'나 '도덕과 윤리' 등과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인정할 수 있는 기준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별적인 특별한 사안들을 우리가 당면할 때에는 이와 같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기준'은 문제의 해결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 해결을 위한 '최선의 열쇠'는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어쩌면 최선이 아닌 차선의 방법은 결국 나무와 숲을 함께 보면서 결코 쉽지는 않지만, 조금씩 양보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고려하는 관용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우리는 왜 나무를 보아야 하고, 또 숲을 보아야 하는 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뇌리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왜 많은 사람들은 나무만을 보려고 하고, 또 숲만을 보려고 하는가?'라는 의문이 남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무와 숲은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이유가 있고, 또 서로가 존재하지 않을 때 각각 자신의 존재가 상실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무와 숲은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상생해야만 존재의 이유도 그리고 가치도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행복한 주말되시길 기원합니다.
박광기 대전대학교 대학원장,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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