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형무소 정문. 사진=동방문화재연구원 |
5월 8일, 대전형무소는 개관 100주년을 맞는다. 비록 망루 하나, 우물터, 왕버들 나무 한 그루만이 그곳에 남겨졌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대전형무소 100년, 중도일보는 실낱같은 기억들의 조각을 모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단편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3.1운동 100년 다시보는 대전형무소 100년] 1. 대전형무소 100년의 의미
대전형무소(개관 당시는 대전감옥소, 1923년 형무소로 개칭)는 1919년 3·1운동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서대문형무소의 수감자를 이감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지은 감옥이다. 개관 당시 둘레 1341m, 면적 112.397㎡, 독방은 80개에 달했다.
대전형무소의 배치도를 보면 전형적인 감옥소의 형태인 방사형 판옵티콘(Panopticon) 구조다. 감시와 철통 보완을 위한 전략적인 설계다. 망루가 그 증거다. 망루는 원래는 형무소 4면에 1개씩 총 4개가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우물터 인근의 망루 하나만이 형무소 터를 지킨다. 망루는 높이 약 7.85m로 4층 계단에 올라서면 대전형무소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형태다.
국가기록원에 남겨진 자료를 종합해 보면 감방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이후 간수소와 청사가 만들어졌다. 이는 대전형무소 건립이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속성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급작스럽게 불어난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기에 서대문형무소가 비좁았던 이유가 가장 크다.
대전형무소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히스토리를 모두 공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역사적 장소다. 1919년 3·1운동부터 4·3사건, 민주화운동까지 민족의 비극은 모두 대전형무소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산 안창호, 몽양 여운형, 심산 김창숙, 고암 이응노, 신영복 선생까지 익숙한 이름들도 대전형무소와 연결고리가 있다. 이뿐일까, 이름도 모르고 죄명도 모른 채 수많은 청년들은 그렇게 대전형무소에서 숱한 불면의 밤을 보냈을 거다.
최근 대전형무소의 역사를 다시 볼 돌아볼 수 있는 새로운 흔적이 발견돼 이목이 쏠리고 있다. 역사문화공원 개발을 위한 작업 중 취사장 터와 담벼락 터가 발견됐고, 대전형무소에 수감자 54명의 수용자 카드도 문화재 등록 이후 첫 공개 됐다. 대전형무소 100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역사적 자료를 어떻게 보존할지 고민해야 봐야 하는 시점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대전형무소의 역사를 세밀하게 들여다볼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대전형무소에 붙잡혀와 억울하게 희생된 수 십만 명의 사람들도 잊지 말아야 한다. 1950년 골령골에서 희생된 누군가의 아들은 아버지보다 곱절의 인생을 살았고, 누군가는 빛바랜 사진 속 오라버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시에 담아내며 한을 삭이고 있다.
산내 희생자 유족 관계자는 “희생자들이 골령골에 묻혔다는 첫 보도가 나왔을 때를 잊지 못한다. 대전형무소 수감과 대학살의 이유를 진상규명해 달라”고 말했다.
이상희 목원대 건축학부 겸임교수는 “대전형무소는 일반적인 감옥소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나 장소성 측면에서도 보존의 가치가 있는 공간이다. 최근 감춰졌던 흔적이 나왔는데 다시 덮이게 된 상황이 안타깝다. 유구에 대한 증거들이 대중과 역사 관광적 차원에서 대전형무소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해미 기자 ham7239@
방사형 구조의 대전형무소. |
대전형무소 건축도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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