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서 대화를 통한 '타협'의 과정에서 서로에게 양보와 관용의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약 양보와 관용이 없다면 애초부터 대화는 성립조차 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양보의 정도와 내용이며, 또한 어디까지 어느 정도까지 관용을 베풀어야 하는 것인지도 중요한 사안입니다. 그리고 갈등과 투쟁의 이해 당사자가 갖는 '타협'의 내용과 정도 또한 그 타협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수용할 수 있는 '타협'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이해 당사자에게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타협'은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고, 그 '타협'으로 인해서 어쩌면 새로운 갈등이 야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은 비단 어떤 갈등과 투쟁의 해결과정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집단적 이해의 대립이나 갈등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타협'은 집단적 이성과 관용 그리고 수용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이런 '타협'과는 별개로 개인적 차원에서 어떤 기준에서 무엇을 인지하고, 그 인지를 바탕으로 스스로에게 수용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개인적 타협'이 내재적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널목이 아닌 도로를 무단횡단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미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량이 없고 건널목이 멀리 있으며 내가 바쁘고 사고가 날 위험성이 전혀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도로를 무단횡단 함에 있어서, 내재적으로 스스로 '합리화'와 동시에 불법과 적법의 사이에서 적절한 내재적 '타협'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비록 사고가 날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무단횡단을 하는 행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이와 같은 '내재적 타협'을 바로 '비겁한 타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비겁한 타협'은 결코 공정하거나 정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업무를 함에 있어서, 과거 동료나 전임자가 행한 적절하지 않은 그리고 적법하지 않은 행위를 발견하게 되면, 그 적법하지 않은 행위에 대한 책임자를 찾아 그 이유와 사유를 찾아내고 적절한 책임을 묻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리고 그 책임과 함께 적절한 처벌을 하고 적절하지 않은 행위를 올바른 것으로 되돌리는 것이 타당합니다. 사실 그 동안 많은 일을 하면서 이 원칙을 준수하고 고수하는 것이 바른 것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를 들면서 이런 원칙에 대해 내 스스로에게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올바르지 않은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보다는 그 올바르지 못한 행위에 대한 이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올바르지 않거나 잘못된 어떤 행위를 발견하게 되면, 그 잘못된 행위의 결과를 보고 끝까지 잘못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찾아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고 반드시 처벌해야만 하고, 바로 그것이 하나의 '일관된 원칙'이라고 믿고 그것이 타당한 조치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 원칙을 고수하기 보다는 '왜 잘못된 행위를 해야만 했는가?'에 더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올바르지 않고 잘못된 행위가 판단의 오류인지, 그리고 고의성이 있었는지, 그리고 개인적인 이해관계 등이 작용해서 나타난 것인지를 먼저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잘못된 판단의 오류이거나 고의성이 없고 개인적인 이해관계 등이 없이 단순한 행정적 과오의 결과였다면, 그리고 그 잘못된 행위를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잘못을 한 행위자에 대해서 그 이유와 원인, 그리고 결과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고 그에 대한 고지를 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는 어떤 올바르지 못하고 잘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철저히 그 책임을 묻고 그에 따른 적절한 처벌을 하는 것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었다고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는 그 행위에 대한 원인이 과오나 판단의 잘못 등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잘못된 행위를 바로 잡는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차원에서 책임에 대한 처벌보다는 '수습'이 타당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생각이나 잘못에 대한 처리 또는 수습을 '합리적인 타협'이라고 스스로 합리화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합리화'라는 명분에서 분명히 '비겁한 타협'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이가 들면서 이와 같은 '비겁한 타협'의 정도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조직을 지키고 구성원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조치라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원칙'에 대한 관대한 적용의 범위를 벗어나는 '비겁한 타협'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외면적으로 잘못에 대한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처리라고도 할 수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원칙'을 다소 벗어나는 비합리적인 처리나 조치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비겁한 타협'이 소위 책임자에 대한 처리나 조직의 위험성을 감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런 자의적인 '합리화'의 결과가 추후 자신이 세운 스스로의 '원칙'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이런 행위가 반복될 경우 오히려 조직의 기강과 '책임성'을 감소시킬 위험성을 배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험성을 알면서도 점점 더 스스로 '비겁한 타협'을 택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큰 변화에 대한 도전을 스스로 피하는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많아지는 스스로에게 '비겁한 타협'을 줄여야 하고, 다시 '원칙'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제라도 스스로에게 '비겁한 타협'보다는 '공정하고 타당한 타협'을 할 수 있도록 반성하고 노력해야 할 것 같습니다.
행복한 주말되시길 기원합니다.
박광기 대전대학교 대학원장,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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