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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인 지음│박소현 옮김│민음사
소설은 '나는 여자들에게 상처 주기를 좋아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화자는 이어 자신의 여성혐오 행각을 고백한다. '물론 육체적이 아닌 정신적으로. (…) 문제는 내가 그들 마음을 다치게 하는 데서 성적인 흥분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진짜로 그러는 게 즐거웠다.'
본인 설명에 따르자면, '나'는 아일랜드 출신 촌뜨기(culchie)이고 알코올 중독자인 데다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대체로 운이 좋지 못한 광고업계 아트 디렉터다. 데이트하는 여성들로부터 자주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자부하지만, 외모와 성기 크기에 상당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무심한 플레이보이 이미지로 자신을 상상하는 '나'는 여성이 나를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순간 그들을 공격한다. 매번 독한 알코올의 힘을 빌려 여성들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상처를 준다. 그런 식으로 본인의 자존심을 세우고, 거기서 쾌락을 느끼며, 심지어 자기가 피해자라며 자위를 일삼는다.
그는 자기를 '산소도둑'이라고 소개한다.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공기를 허비한다고 여겨질 만큼 쓸모없는 존재라는 것.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신의 폭력과 혐오를 정당화하며 자기가 이렇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고, 긴긴 이야기를 들려준다.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주는 것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변호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의 모든 변명은 '산소 도둑'이 자행한 악덕의 공공연한 증거가 될 뿐이고, 독자들 또한 익명의 화자가 펼쳐 보이는 이야기 속에서 망상과 열등감, 기억의 날조만을 읽어 낼 따름이다.
여성 혐오자의 내면을 고백록(혹은 일기) 형식으로 여과 없이 그려 낸 『산소 도둑의 일기』는 데이트 폭력과 가스라이팅, 성적 착취의 메커니즘을 낱낱이 고발하는 일종의 조서(調書)로 수십만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 시작은 2006년 네덜란드에서 출간된 독립출판물이었지만 입소문과 SNS 소개로 관심을 끌며 2016년에는 전미 베스트셀러로 등극한다.
산소도둑이 자랑스럽게 드러내 보이는, 가해자임에도 피해자라 주장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편집증적 망상과 열등감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책을 읽은 이들 사이에서는 산소도둑이 과연 실존 인물인지, 소설이 실화인지 픽션인지, 정말 남성이 쓴 건지, 아니면 여성이 완벽한 미러링으로 쓴 건지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현재 영화 「메이즈 러너 시리즈」를 제작한 고담그룹에 영화화 판권이 팔린 상태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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