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득신(金得臣, 1754 ~ 1822, 도화서 화원)의 강변회음도(江邊會飮圖, 18세기 말~19세기 초, 화첩 종이에 담채, 22.5 x 27.2 cm, 간송미술관 소장)를 감상해보자. 다수의 사람이 강가에 모여 앉아 음식을 나누어 먹는 그림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 숨겨진 이야기를 간단한 점과 선으로 생생하게 살려냈다. 인물 묘사가 탁월한 김득신의 수작 중 하나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가마우지이다. 낚싯대일까? 배에 세워진 대나무 위에서 정겹게 놀고 있다. 여유로운 움직임이 쉬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마우지 보기가 쉽지 않다. 드물게 도서지방 절벽 위에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백령도에서 본 일이 있다. 두무진(頭武津) 우뚝우뚝 솟은 암벽에 꽤 많은 가마우지가 서식한다. 그들의 배설물로 암벽이 하얗게 뒤덮여 있다. 중국 구이린(桂林)에서도 보았다. 어부가 배에 태우고 다니며 고기잡이하는 모습도 보인다. 혼자 타기 적합한 조그만 배에 가마우지 한두 마리를 태운다. 물질하여 잡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도록 가마우지 목을 줄로 묶어 놓았다. 다리에도 줄이 묶여있다. 물질하고 나오면 줄을 잡아당겨 잡은 물고기를 빼앗는다.
가마우지 고기잡이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천렵도川獵圖라 부르기도 하고, 맨발에 바지를 걷어 올린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기잡이임은 분명해 보인다. 천렵은 봄부터 가을까지 주로 남자들 하는 놀이였다. 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로 하는 것이다. 탁족濯足과 함께 많은 사람이 즐기는 우리네 여름철 피서법이기도 하다. 누구나 경험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낚시, 어항, 그물 등을 준비하여 물고기를 잡는다. 방금 잡은 물고기에 가지고 간 푸성귀와 양념을 넣고 매운탕이나 어죽을 끓인다. ‘돌이뱅뱅이’라고 하여 튀기거나 굽기도 한다. 강물이 오염되기 전에는 산채로 초고추장 찍어 먹던 모습도 보았다.
배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부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많은 사람이 함께 고기잡이하기에는 배가 작다. 얼핏 보면 움막이 배 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덕과 배 난간 선을 살피면 움막은 배 뒤편에 별도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에 설치된 움막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고기를 손수 잡지 않고 어부의 도움을 받은 것은 아닐까? 그림에는 생략이 많아 꼭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당시의 천렵은 피서만이 아니라 몸보신을 위한 놀이였다는 점이다. 더위를 이겨내려면 영양보충이 필수였다. 당시엔 단백질 섭취가 쉽지 않았다. 가축을 주로 이용하였으나 물고기도 좋은 영양식이었다. 지금도 붕어찜이나 잉어탕은 보양식으로 먹는다.
염천에 바람이 건들 분다. 강물 위 떠 있는 배가 흔들흔들 몸을 뒤척이며 일으키는 물살, 살랑살랑 지친 마음 훔치는 버드나무 가지,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자유분방하게 둘러앉았다. 말없이 먹는 일에 열중이다. 가운데에 커다란 물고기가 놓여있다. 다른 반찬은 모두 생략한 그림이다. 앞앞에 밥그릇이 놓여있다. 김득신의 여러 그림에 등장하는 밥그릇은 모양이 꽤 크다. 모두 젓가락을 들고 있으니 그릇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대포 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음식을 즐기고 음미하기에 분주하다. 시선이 모두 제각각이다. 언제나 무리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겉도는 사람이 있다. 시구라도 떠오른 것일까? 깊은 소회가 있는 것일까? 한편에 쪼그려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나무 뒤에 서 있는 아이가, 그에게 음식이라도 권하는 것일까? 맨 앞에 앉은 아이가 이야기 소리에 올려다보고 있다.
앉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왜 물가에 와 있는가? 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선현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물의 혜택은 참으로 많다. 아니, 혜택 정도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요, 생명의 연출자이다. 역할로 보아 생명 지속의 핵심이다. 사사로이 주는 이로움도 하나둘이 아니다. 그러면서 공을 다투지 않는다. 빠짐없이 적셔주고 앞으로 나아간다. 낮은 곳으로 임 하고서야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주목하고 싶은 하나가 있다. 사람의 조급하고 찌든 마음, 개개인의 편협된 생각, 상호불신, 흑백논리로 첨예하게 대립 되어있는 사회가 걱정이다. 물이 서로의 화기를 달래준다는 사실이다. 친수환경이라 이른다. 순수 자연은 손대지 말아야 한다는 것에 찬성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손댄 것은 안전하게 가져가야 한다. 문명강과 자연강의 구분도 못하는 환경논의가 안타깝다.
더위가 온누리 덮으면 누구나 피서를 간다. 피서 풍경도 많이 변했다. 해외로 많이 나간다. 지루해서일까 볼 것이 없어서일까? 스스로 볼거리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다. 어느새 차 안이 덥다. 간사스러운 사람 모습이다. 백년하청이 될지 모르겠다. 그림을 보며, 화기를 달래고 서로 배려하는 따뜻한 세상이 오기를 염원해 본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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