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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앨리 스미스 지음│김재성 옮김│민음사
'그는 여든다섯 살이야.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여든다섯 살짜리 남자가 어떻게 네 친구니? 왜 정상적인 열세 살짜리들처럼 정상적인 친구를 사귀면 안 되는 거니?
그건 엄마가 정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 정의는 내가 정상을 정의하는 방식과 다르겠지만요. 우리는 모두 상대성 속에 살고 현재 정상에 대한 내 정의는 엄마의 정의와 다르고 아마도 결코 같아지지 않을 거예요.'-본문 중에서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는 문장으로 소설 『가을』은 시작한다. 세상 모든 것은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렇듯이 무너지기 마련이라는 체념같은 말도 계속된다.
백한 살이 넘어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대니얼의 독백이 가진 늦가을 낙엽만큼 가라앉은 분위기는, 페이지를 넘기면 등장하는 서른두 살의 미술사 강사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둘러싼 일상의 공기로 이어진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전후의 시점. 탈퇴 찬성 51.9%, 반대 48.1%로 근소한 격차로 여론이 나누어진 영국 사회는 반으로 갈라져 뒤숭숭해졌다. 엘리자베스가 스쳐 지나가는 동네 풍경들, 관공서에서 대기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배경처럼 그를 휘감으며 현재 영국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달한다. 엘리자베스는 여권을 새로 신청하기 위해 우체국에서 하염없이 순서를 기다리고, 우체국 직원과 대화하며 '머리 크기가 규격에 맞지 않기 때문에' 여권 신청을 거절당한다. 규정과 증명을 강요하는 관료주의적인 사회. 대니얼과 엘리자베스가 보내는 일상의 온도는 차갑다.
소설은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이 함께 보낸 시절을 현재와 교차하며 보여준다. 어린 엘리자베스가 '이웃과 인터뷰하기' 숙제를 하기 위해 대니얼의 집을 방문하면서 둘은 친구가 된다. 대니얼은 엘리자베스의 십대시절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일깨우며 그가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하게끔 도와준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엄마는 늙은 게이와 십대 소녀가 친구라는 건 '정상적'이지 않다며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늙은 동성애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는, 나와 다른 존재를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로 확대된다. 어린 시절의 엘리자베스는 이웃 대니얼 덕에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깊이 있는 인간으로 성장했으며, 대니얼 역시 사회적 소수자로서 비참한 삶의 노년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엘리자베스라는 가까운 이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뤄 낸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 곁에서 인간적 존엄을 지키며 보낼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이웃이 되는 경험이 특별하며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시간은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울타리를 쳐도 영원한 순환을 반복하리라는 것을 소설 속에서 내내 역설한다. 왜 하필 그 사람이냐는 엄마의 질문에 "우리 이웃 사람이니까요"라고 말한 어린 엘리자베스의 말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명장면 명대사'다.
백한 살이 넘어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는 대니얼과, 사회인이 된 엘리자베스의 일상은 '독거노인'와 '비혼여성'을 넘어 '관료주의'와 '난민'으로 생각의 영역을 넓히게 한다. 엘리자베스는 병원에서 급히 진료를 받으려고 하지만 자신이 누군지 증명할 대학 교직원증부터 내밀어야 했다. 온 나라 사람들은 타자로 인해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며 '여권'이나 '이주' 같은 단어를 검색한다.
끊임없이 선을 긋고 '나'와 '타자'를 구분 지으려 하는 세상. 타자 혐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유럽 사회는 난민 문제로 인해 큰 홍역을 겪고 있고 제주 예멘 난민 사태에서 보듯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단계에 있다. 작가는 이런 세상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책에 온전히 담았다. 이웃과의 교감이 개개인의 삶에 얼마나 강한 불빛이 되며, 더 나아가 사회를 건강하게 밝힐 수 있는지를 우아하고도 날렵한 태도로 통찰력 있게 보여준다.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도서 시장에서 화제가 되며,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큰 주목을 받았다. 작가의 '사계절 4부작' 연작 중 첫 번째로 출간됐으며, 향후 전 작품이 국내에 소개될 예정이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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