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친구는 내가 대전으로 올 때쯤부터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면서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KTX로 한 시간 거리니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의 발은 결정적인 순간 무언가에 꽁꽁 묶였다. 어학 성적을 내야 하니까, 에세이를 써야 하니까, 대전이라는 낯선 도시 그리고 회사에 적응해야 하니까, 일이 밀려 있거나 언제 생겨날지 모르니 미리 해야 한다거나, 어디에서 만나야 할지 몰라서, 다녀오면 피곤할 것 같아서, 교통비까지 돈이 얼마나 깨질지 모르니까. 이유는 많았다.
어쨌든 친구와 얼굴을 마주하고 싶다는 배부른 소망은 먹고사는 일의 뒷전에 밀려나 있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꼭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짜고짜 서울로 가겠다고 했다. 친구도 흔쾌히 좋다고 해 처음으로 평일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다. 이렇게 훌쩍 잡은 약속에는 어디서, 언제, 보자는 계획도 없었고, 다짐도, 설득도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시청역 인근 어딘가에서 밥이나 한 끼 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게 다였다.
이날의 '급만남'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만나기 힘든 딱 하나의 이유는 무거운 첫걸음 때문이라는 점이다. 가끔 우리에겐 구체적인 계획이나 결심보다 당장의 실천이 필요하다. 만남에 앞서 계획하고, 준비하고, 다짐하는 과정을 거치다보면 '만나자'는 말만 하다가 아예 포기하기도 한다. 앞서 우리의 만남에는 변경, 취소가 수없이 반복됐다. 어렵게 생각하지만 않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 데도 앞날에 대한 고민만 하다가 만나지 못했다. 물리적 거리만큼 멀어지는 것 아닌지 속상함만 커졌다. 그저 많은 망설임이 우리를 붙잡아 뒀기 때문인데도 말이다.
돌이켜보면 모든 일을 시작하기 앞서 스스로 설득하느라 시간과 감정을 크게 낭비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도 걱정한다. 신중하게 결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준비과정이 지나쳐 지쳐 포기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생각하면 할수록 안 되는 이유만 늘어난다.
사실 하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 시작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해야 할 지는 가면서 생각하면 된다고 깨닫는다.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연말이면 어김없이 깨닫는 현실이다. 대책 없어 보이더라도 마음 가는 대로 하다보면 또 그곳에서도 잘 살아가는 나를 마주하지 않았던가. 전유진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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