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31일 대전문학관 제1회 문학콘서트에 앞서 김성동 소설가를 만났다.
작가는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지만, 대전을 제2의 고향이라 부를 만큼 대전에 대한 기억이 많다. 서대전국민학교 졸업장은 그의 유일한 졸업장이고, 목척교와 충혼탑, 대전형무소, 충남도청 옆 법원까지 그때 그 시절의 대전을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작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청의 말과 시대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아버지, 삼불(三不)의 덫에 잡힌 인생, 그럼에도 소설을 써야 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중도일보 독자들에게 전해왔다.
-충청의 말모이, 소설 국수
문화일보에 첫 연재 후 약 27년 만인 2018년 소설 국수(國手)의 1부(총 5권)가 완간됐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읽은 책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국수는 충청인에게 역사적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소설이다.
문단과 학계에서는 소설 국수를 두고 ‘우리말 보물창고’라 부른다. 이는 소설 국수가 충청, 정확히는 내포 지방에서 사용됐던 충청의 언어로 쓰였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 최초의 국어사전의 뿌리가 된 말모이처럼, 100년 전 민중들이 쓰던 충청의 말을 빼곡히 기록한 역사서 혹은 충청어(語) 사전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성동 작가는 “청양에 선산이 있어요. 날 ‘비(飛)’에 봉황 ‘봉(鳳)’자를 써서 비봉산이라 불렀죠. 그런데 일제가 봉황 봉(鳳)자를 봉우리 봉(峰)자로 바꿔버렸단 말이지. 봉황이 어디에나 있는 흔한 봉우리가 됐다”며 왜말의 역습으로 사라진 우리말에 대한 안타까움을 개탄했다.
이어 “충청도 언어의 알맹이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 바로 내포지역이다. 국수는 가장 조선적인 풍습과 언어의 뿌리가 남아있는 충청의 언어로 100년 전 내포 지방에서 겪은 일들을 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을 했던 김성동 소설가의 아버지는 해방 직후 왜놈들이 바꾼 충청의 어휘들, 땅이름, 역사적 이름들을 수집해 서울 중앙당에 보내는 중책을 맡았었다. 시대는 변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충청의 언어를 지켜왔다.
“내가 칠십 평생을 써온 말이지만 소설에 옮기기 전에 반드시 어디서 어떻게 나온 말인지, 꼼꼼한 검증을 거칩니다. 국수에 쓴 단어들은 모두 확신에 찬 충청의 말인거죠.”
-아버지 그리고 할아버지
"아버지는 내 소설의 출발점이고, 내 소설의 뿌리는 할아버지다."
김성동의 문학 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다.
김성동 작가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했으나 6.25 전쟁 이후 사상범으로 몰려 대전형무소에 수감 됐다. 이후 1950년 산내 골령골(소설가는 뼈재골이라 부른다)에서 총살당해 유해도 찾을 수 없었다. 작가는 대전으로 이사를 온 뒤 당시 용두동 충혼탑에서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의 비밀을 듣게 됐고, 삼불(三不)의 덫에 붙잡히고 만다. 삼불의 덫이란 공무원이 될 수 없고, 군대를 가도 장교가 될 수 없는, 고시에 합격해도 임용될 수 없었던 한마디로 ‘연좌제’를 말한다.
김성동 작가는 “아버지의 비밀을 안 뒤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 수 없었다. 19살 승려가 되어 절에 들어갔다. 20대의 방황을 그린 소설이 바로 목탁조와 만다라였다”고 말했다.
만다라를 발표한 후 문단의 호평은 쏟아졌지만, 승려에서 다시 소설가로 삶의 굴레를 바꿔야만 했다.
“엄마와 개구리라는 단편소설이 있어요. 아버지만큼이나 어머니도 수난을 많이 겪으셨는데, 어머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죠. 1975년 동아일보에서 올해의 베스트 소설을 뽑았는데, 평론가 절반 이상이 만다라를 꼽았어요. 그런데 일면식도 없었던 김현 평론가만 엄마와 개구리를 올해의 소설로 꼽은거야. ‘아! 이렇게 쓰면 되는 구나’라고 깨달음을 얻었어요. 이때부터 힘을 얻어서 글을 계속 쓸 수 있었어요.”
하지만 소설가의 의지도 이데올로기는 넘을 수 없었다.
80년대 문예중앙의 원고 청탁을 받은 김성동 작가는 본격적으로 가족사를 글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이때 작가는 대전 신도안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풍적이라는 소설이다. 첫 장면은 골령골에서 총탄에 맞아 숨진 아버지의 혼이 빠져나오는 모습이다. 아버지의 혼이 떠돌다 아들을 보기 위해 고향 보령으로 찾아오는 여정을 담았다. 프롤로그는 전작들처럼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평론가들은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며 김성동 소설가의 새로운 문학세계관을 연일 호평했다.
충격적인 프롤로그 이후 본격적인 사건을 다룬 제1장이 시작되자 검열의 칼날이 들어왔다. 붉게 밑줄이 그어진 원고를 받아든 김성동 작가는 결국 풍적을 미완의 소설로 남겨두게 됐다.
김성동 작가는 “이데올로기와 검열은 여전했어요. 아버지 이야기는 더이상 쓸 수 없겠구나 싶었지. 그래서 돌파구로 찾은 것이 아버지, 할아버지가 아닌 증조할아버지의 시대인 100년 전으로 시간을 뛰어넘어보자는 거였어. 사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부조리나 모순은 해결되지 않고 쭉 이어져 오고 있거든. 그래서 시작된 소설이 바로 국숩니다.”
김성동 소설가는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조선왕조부터 논어, 맹자 등 구술역사를 배우며 컸다.
아버지의 부재가 일찍부터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와의 교류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역사는 승리자가 아닌 패배자, 낮은 자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충청인의 역사였다.
“국수를 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할아버지 덕분이지. 감사해서 나중에 내가 할아버지께 절을 했어.”
-대전과의 인연, 계속된다
김성동 작가는 이른바 가내수공업자다. 여전히 펜과 연필로 육필 원고를 쓴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은 4000장의 육필 원고가 있다. 대전과 인연이 깊은 김성동 작가는 이 원고를 대전문학관에 모두 기증했다. 현재는 국수는 1권 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이 원고 또한 대전문학관에 기증될 전망이다.
김성동 작가는 “내 인생은 3판이다. 바둑을 잘 뒀기 때문에 돌판에서도 잠시 있었고, 스님을 했으니 중판, 지금은 글판에서 살아간다. 여전히 아버지는 내 소설의 출발점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꿈, 그 시대 아버지 세대 가졌던 이야기들을 계속 쓰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삶에서 겪는 억누를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다. 이렇듯 문학은 자신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해미 기자 ham7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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