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뢰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나는 그대여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
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
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내리고
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밤이 이슥도록 강둑을 걸을 때는
들 건너 창호지 불빛 아래 포효하는
다듬이 소리로 울부짖었나이다
홍두깨 소리로 울부짖었나이다
날 잡숴 날 잡숴
길쌈하는 여자들 뒤통수 내리치는
잉아 소리, 베틀 소리로 부르짖었나이다
즈믄 가람 걸린 달하
서방정토 관음보살전 뵈옵거든
시방세계 가위눌린 여자 생애
천지개벽 윈완생 아뢰주오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누구를 위해 시를 쓰는가. 시인 고정희는 활화산 같은 시인이었다. 현실을 외면한, 민중을 외면한 시는 진실하지 않다. 픽박받고 억압받는 민초들 속에서 고정희는 온 정신과 정열를 다 바쳤다. 5월의 광주는 그 시대의 양심있는 시인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총칼로 여인의 가슴을 도려내는 진압군에 맞선 광주 시민들은 지금 어디서 안식의 자리를 잡고 있을까. 모성과 불굴의 의지로 부조리한 현실에 맞선 고정희의 숨결은 지금은 지리산에 감돌고 있다.
안락한 자본주의를 박차고 여성의 인권을 위해 온 몸으로 저항했던 시인. 그에게 지리산은 어머니의 품같은 산이었다. 지친 몸을 품어주는 지리산. 마음의 안식처. 결국 고정희는 어머니의 가스같은 지리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6월의 어느날, 그 곳에서 홀연히 이승에 하직을 고했다. 지금 지리산은 봄의 기운이, 생동하는 생명들이 춤출 준비를 할 것이리라. 고정희의 영혼을 느끼고 싶다. 지리산의 봄.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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