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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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승인 2019-03-19 09:25
  • 방원기 기자방원기 기자
송지연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르노의 <미술의 기원>이라는 그림이 있다. 정확하게는 장바티스트 르노의 <미술의 기원 : 양치기의 그림자를 더듬어가는 디부타데스>라고 한다.

원래부터 잘 알고 있던 그림은 아니다. 나는 이 그림에 대한 정보와 통찰을 <영혼의 미술관>이라는 책을 통해 얻었다. 그런데 검색하는 과정에서 이 책을 거론하지 않고도 르노의 그림에 대해 비슷한 맥락에서 많이들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이디어를 얻고도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면 미술계에서 이미 너무 유명하고 상식적인 그림 이야기인지라, 필자들이 저자인 알랭 드 보통의 시각에 별다른 오리지널리티가 없다고 판단하여 생략했을 수는 있겠다. 하지만 모르는 게 많은 나는 어찌되었든 책의 소개로 알게 되었고, 또 연관된 내용을 일부 인용할 것임을 밝힌다.

한 여자가 곧 떠날 연인의 그림자 윤곽을 그리는 그림이다. 기억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인간의 취약한 기억력을 이기고 오래도록 기억해내고 싶은 욕망이 그림을 그리게 한다는 얘기가 된다. 우리 주변에는 일시적이고 아름다운 경험이 많고, 미술은 그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것이 정말로 미술의 기원일까. 적어도 예술의 여러 기능과 동기 중 하나이기는 할 것이다.

르노의 그림 속 여자가 그림으로 남기고자 한 것이 연인의 정확한 외모 그 자체는 아니리라. 오히려 그 순간 자신이 느낀, 부정확하고 모호하며 그럼에도 마음이 동하는, 사랑의 감정을 그나마 최대한 질서있고 정확하게 기록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 순간의 공기 냄새나, 그 순간의 눈빛과 체온 등 가슴 벅찬 사랑의 느낌들을 구체적이고 영원한 방식으로 간직하고자 했을 것이다.



"가족사진을 찍고 싶은 충동을 생각해보라. 카메라를 꺼내들고 싶은 충동은 우리의 기억이 시간의 흐름에 약하다는 불안한 자각에서 나온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타지마할을 잊고, 시골길을 잊고, 무엇보다 아이가 7살하고도 9개월일 때 거실 카펫에서 레고 집을 쌓던 그 순간의 표정을 잊는다."

4개월 아기를 키우는 중인 요즘 나는 이 심정을 특히나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아기와 매일 만나고 헤어지는 기분마저 드는 탓이다. 훗날의 그리움을 예감하는 만큼, 엄마의 뽀뽀에 꺄르르 웃는 아기의 갱신되는 '오늘 얼굴'을 날마다 저장하고 싶다. 자꾸만 카메라를 꺼내들고 방금 전에 지나간 그 미소, 그 표정을 다시 보여달라 아기에게 아기처럼 떼쓴다.

예술보다 기술을 생각한다. 'art'의 원뜻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필름도 암실도 동영상 촬영기사도 없이, 누구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 카메라만으로, 현실의 시공간을 시청각 면에서 그대로 복사하여 영원히 보관할 수 있게 해주는 디지털 기술의 인문적 유용함이 새삼 신기하고 고마워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과학 기술은 인류에게 더 다양한 경험과 느낌을 수월하게 선사한다.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기억을 돕는 예술과 통한다.

영화 <시>에는 조그마한 시창작 클래스에서 수강생들이 "내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에 대해 발표를 하는 시퀀스가 나온다. 사람들은 발표 도중 모두 운다.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이란 왜인지 깊은 슬픔과 연결된다. 아름다움 안에 이미 슬픔이 들어있는 것일 수도 있고, 고단한 삶 속에 아름다움이 워낙 귀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주인공인 미자는 유년기의 맨 처음 기억에 대해 말한다. 힘들게 손주를 보살피는 할머니가, 거꾸로 보살핌받는 아기였을 때를 떠올리며 운다. 할머니에게도 7살 터울의 '우리 언니'가 있었다. 아장아장 걸음마만으로도 온전히 칭찬받고 사랑받던 오래된 과거의 희미한 기억 속에서 - 정성스레 예쁜 옷을 입혀주고 손뼉치며 이름을 불러주는 언니의 목소리에 어린 당시에도 기분이 무척 좋았던 것이 기억난다는 미자.

아기를 키우면서 나 역시 기억에서 거의 사라진 나의 아기 시절, 나아가 부모님의 아기 시절에 대한 전에 없던 상상력이 생긴다. 나도 앙앙 울고, 낑낑 뒤집었을 것이다. 젊은 부모님은 바둥거리는 나를 소중하게 안아주었겠지.

바야흐로 디지털 영상 시대. 아기를 예뻐하는 부모의 유튜브 영상 밑에서, 자신도 아기 때에 저렇게 작은 행동 하나에도 부모님이 크게 기뻐하셨겠지 싶어 눈물이 난다는 댓글들을 마주치곤 한다. 그 눈물은 미자의 눈물과 얼마나 다를까.

2018년에 태어난 나의 아기는 언젠가 어른이 되어 자신이 이토록 기쁨의 한가운데에 있었음을, 가족 모두에게 사랑받았음을 실제와 거의 같은 화질과 음성이 담긴 사진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보통은 기억하지 못하던 유년기의 기억이 디지털 시뮬라크르에 의해 인간적으로 강화된다는 것은 다음 세대에게 어떤 새로운 내면을 형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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