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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걸어보니 식당에서 오빠네 직계인 삼대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고 계시단다. 전화기 안에서 행복한 식사 시간임을 알리는 손자 손녀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소식을 미리 전하지 않고 다니는 나의 습관이 즐거운 시간에 폐를 끼친 것 같아서 미안하기만 했다. 오빠가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서 올 생신은 가족끼리만 한다고 연락했는데 내가 깜박한 것이다.
아니, 오빠 건강이 궁금해서 방문을 했던 것이다. 그래 다행이다. 오빠가 거동이 가능하신 것이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운전을 하며 오빠네 동네를 벗어나서 재래시장 앞을 지나는데 신호가 빨간 신호로 바뀌어 난 1차선 맨 앞쪽에 멈추게 되었다. 그런데 반대편차가 달려오며 지그재그로 길에서 춤을 춘다. 나에게 덮칠까보아 조마조마 했다. 여유가 있는 편도3차선이니 나를 덮치지 않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또 다른 차가 그 차를 피하려다가 달려와 신호대기를 하던 내 운전석을 박는 것이 아닌가? 나는 지그재그 하던 차 때문에 신경이 곤두 서 있었는데 다른 차량이 달려들다니. 그래도 천만 다행이다. 대전까지 운전이 가능할 정도로 랖 범퍼만 살짝 들어갔다. 그리고 우리아이들이 놀랬을 뿐이다.
음주운전인 것 같았다. 그는 딸한테 전화를 걸어 뒤 처리를 맡기고 도망가려고 한다. 집이 이 근처라 경찰이 오기 전 딸이 먼저 달려 왔다. 너무 어이가 없다. 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딸의 요구대로 보험회사에 처리를 맡겼다.
아니 솔직히 우리 오빠에게 행운이 오기를 바래서 선처를 바랬다. 정말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게 불편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오빠 댁을 방문할 때마다 오빠는 손녀딸과 놀고 계셨다. 겉으로 환자인지 잘 모르겠다. 병명은 급성골수종. 너무 고생이 많은 탓일까? 밤에 잠을 못 주무실 정도로 편찮으시다고 한다.
오빠는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40여년을 훌쩍 넘겨 근무하셨다. 힘들어 하실 때도 있어보였으나 천직인 듯 학교를 졸업하지마자 정년까지 너무 열심히 학생들을 위해서 사셨다.
그런 오빠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
너무 안타깝다. 인재셨는데 동네 어른들께서도 문상 오셔서 안타가워 하셨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오빠가 세상을 등진지가 몇 년 되는 날이었다. 난 오빠가 보고 싶어 산소에 가서 뵙고 왔다. 오빠 묘에서 얼마 멀지 않은 무덤 위에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이분도 어지간히 담배를 좋아하다가 천국 가셨나 보다. 우리 오빠도 담배를 돌아가시는 날까지 피셨는데,
오늘 날씨가 우리 오빠가 하늘나라 가는 날처럼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가 약하게 불었다한다. 갑자기 오빠가 머물던 병실이 생각났다. 그 병실은 맑은 날 햇살이 한강변에 내리비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으나 이 병실에서 운명하는 사람이 많다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언짢았다. 아무리 아름다운 장소도 오빠가 존재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을 했다.
오빠 생전에 병실에서 있던 일이 뇌리를 스친다. 오빠 병실은 창문너머로 남이섬이 보인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섬이 너무 환상적이었다. 그래서 그 유혹에 끌려 밖으로 나왔다. 남이섬 갔다가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오빠가 어디 가느냐고 못 가게 했지만 나는 "오빠 잠깐만이면 돼요. 두 시간정도면 돌아올 게요" 하고 병실에서 나와서 남이섬으로 갔다.
난 남편과 남이섬을 전기자동차로 돌고서 음식을 먹는데 카톡 문자가 날아왔다.
'오빠 사망'이라고. 벌써 길을 떠나시다니요. 아직도 몇 년은 더 사실 줄 알고 임종도 못하고 남이섬 구경을 했는데.
오빠가 붙들었을 때 옆에 있었어도 돌아가시지는 안했을 텐데 하고 나를 원망도 해 본다. 오빠의 주검을 대하기 민망하여 장례식장 옆 한강변을 거닐며 월명스님께서 죽은 누이를 그리며 쓴 향가를 되 뇌였다.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바람에
여기 저기 떴다가 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아아, 미타찰에서 만나올 나
도 닦아 기다리겠노라』
만약 내가 월명사의 누이처럼 오빠보다 세상을 먼저 떴다면 아무리 남이섬이 환상적이라 해도 오빠는 나를 병실에 놔두고 나가지는 않았으리라. 오빠는 나를 어릴 때부터 사랑해 주었으니까. 애통해 하는 오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빠 미안해. 오빠, 나 지금도 철부지 인가봐."
한강변에 새들이 무리지어 이 나무 저 나무 혹은 잔디위로 옮겨 다니는 모습이 오빠가 하늘나라 가시면서 나를 울지 말라고 달래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등에 잘 업어주셨던 오빠. 겨울이면 돌덩이를 데워다 내 발 밑에 놓아주던 오빠.
아, 오빠. 우리 오빠.
김주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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