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구 한국화학연구원 RUPI사업단장 |
학창 시절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은 서울 세검정에 있었다. 앞뒤 정원에는 많은 나무가 그늘을 제공하고 사시사철 온갖 꽃들이 피어서 보기에 참 좋았다. 봄에는 붉디붉은 영산홍으로 눈이 호강하였고, 가을엔 짙은 국화 향기가 집안을 가득 메웠다. 아버지가 지극정성으로 가꾼 매발톱꽃과 금낭화, 은방울꽃, 용담, 초롱꽃, 수선화, 앵초, 돌단풍꽃 등 앙증맞은 야생화 모습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아버지가 선종하신 지 10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아버지와 함께 예쁜 꽃을 심던 추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잔디정원 한 귀퉁이에서는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바로 달래다. 처음엔 잔디와 비슷해 구별하기가 힘들었지만 한참 동안 쭈그리고 앉아 달래를 한 움큼 캐어 어머니께 가져가면 손맛으로 무쳐주신 달래의 알싸한 맛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달래 알뿌리의 얇은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는 것도 재미있었다. 밭에서 호미로 흙을 뜬 다음 살살 달래가며 캐야 하는 달래는 가늘고 잎이 연하다. 달래는 독특한 맛과 향취로 예로부터 강장식품으로 알려졌다. 칼슘, 인, 철분 등 무기질이 풍부하고 빈혈을 없애며 노화를 방지한다.
봄이면 냉이와 달래가 어김없이 식탁으로 달려오듯이 누구에게나 곧 노년의 삶이 닥쳐온다. 매일 익숙한 일상만 살다 보면 외부의 시간 감각도 의미 없이 빠르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은퇴 후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 찾아 집중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습관이 주는 편안함을 이기는 것에서부터 잘 늙기 위한 준비가 시작된다"는 말이 새삼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려면 새로운 관계 맺기가 매우 중요하다. 얼마나 행복하는냐의 척도는 '관계'다. 다양한 연령층과 어울리는데 적극적인 관계 중심적인 사람일수록 건강한 노년을 보낼 수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깊은 성숙을 향한 여정이다. 삶의 단계는 다 그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다. 비록 젊은 시절의 원초적 환희는 아니겠지만 노년에 접어들어도 여전히 새롭고 진정한 경험을 맛볼 수 있다. 그러므로 노년에 일이 없으면 매우 불행하다. 늙는다는 것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이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성장이 지속되며 성장하는 동안에는 늙지 않는다. 무조건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야겠다. 노년의 삶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따라 남은 인생이 달라진다.
이동구 한국화학연구원 RUPI사업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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