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은 우리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이 된 대혁명으로 그 함성은 100주년의 오늘에도 울리는 듯하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 미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은 우리민족에겐 한 줄기 빛이었다.
그에 고무되어 1919년 2월 1일 조소앙, 신채호 등 39인의 지사들이 중국 길림에서 최초의 독립선언서인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최팔용, 송계백, 이광수 등 재일유학생들이 적의 심장부인 일본 도쿄에서 2. 8독립선언서를 발표했고, 그들의 영향으로 마침내 조국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기미독립선언서라고도 하는 독립선언문은 천도교의 손병희 등 종교계인사 33인이 민족대표로 조직되어 최남선이 작성하고 공약삼장(公約三章)은 한용운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선언서의 원고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인쇄소 이종일(33인의 1인) 사장에게 넘겨져 하룻밤에 약 2만 1000장을 인쇄하여 2월 28일에 학생들과 각처에 배포됐다.
민족대표들은 고종의 장례식 이틀 전인 1919년 3월 1일 정오에 탑골 공원에서 독립을 선포하는 선언식을 열기로 했으나 행사가 자칫 폭력시위로 변할 것을 우려해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태화관은 지금의 인사동 태화빌딩 자리로 이완용이 일제로부터 받은 순화궁을 당대 유명 요릿집인 명월관이 빌려 분점격인 태화관을 연 것이다. 지하철 종각역 3번 출구에서 골목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현재 태화빌딩 1층 로비에는 민족대표 29인이 그려 진 커다란 민족기록화가 걸려 있는데 그림의 인물이 29인인 것은 국외체류중이거나 미도착으로 선언식에는 29명만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두 시가 되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뒤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일본경찰에 통고한 후 자진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는 아마 우리의 독립의지를 적극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대표 강기덕, 김원벽이 주도하는 학생들의 독립선언행사가 진행됐다. 행사 중 한 청년이 팔각정 단상에 올라 소지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는데 후에 그는 30대 청년 정재용으로 밝혀졌다. 백운대 암벽에 독립선언서를 최남선이 쓰고 정재용이 읽었다는 내용이 한자로 서각 되어 있는바 그만큼 정재용에게도 큰 자랑이었을 것이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이화학당 고등과 학생 유관순 소녀는 5일, 다섯 명의 동지들과 남대문역(서울역)에서 귀향객들이 벌인 만세시위에 함께했다. 고향 목천(천안)으로 내려와서는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돌며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그 후 4월 1일 아우내(並川)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대학시절 병천 출신 유(柳)아무개 후배에게서 아우내 시위 중 쫓기는 유관순을 그의 할머니가 부엌에 숨겨주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종 장례식 후 각지로 귀향한 사람들로부터 점화된 독립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압과 수탈에 격분한 농민들의 합세로 온 나라로 들불처럼 번져 전 국민의 약 10%나 되는 200만 여명 정도가 참여했다고 하니 우리 선조들의 애국심과 단결심을 가히 알만하다.
이날 그녀는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어 헌병대로 압송되었으며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도 옥중투쟁을 이어갔고 이듬해 3월 1일에는 동지들과 옥중만세운동을 벌였다. 경성의 법정에서는 “내 나라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나를 재판하느냐?”라며 끝까지 항거했다고 한다.
최근 이 상황을 주제로 한 ‘항거’라는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재판 중 일본인 검사에게 걸상을 던져 법정모독죄 가산으로 7년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9월 28일 결국 옥중에서 치열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나이 겨우 18세였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아우내장터 시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마저도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유 열사의 일생은 지난 해 3월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다. NYT는 유 열사의 출생과 성장과정,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업적 등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뉴욕 주는 유 열사를 기리는 ‘3.1운동의 날’ 결의안을 채택했고, 롱아일랜드 낫소 카운티도 ‘3.1운동의 날’을 지정하고 ‘유관순 상’도 제정했다고 한다. 콜로라도에서도 유 열사의 업적을 기리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이들은 모두 3.1운동이 자유와 인권을 위한 투쟁이고 전 세계가 공유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아! 유관순 열사가 가신지 100년.
그 애국사랑의 뜨거운 피는 지금도 필자를 비롯해 우리 가슴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장준문/ 조각가, 수필가
민족대표들은 고종의 장례식 이틀 전인 1919년 3월 1일 정오에 탑골 공원에서 독립을 선포하는 선언식을 열기로 했으나 행사가 자칫 폭력시위로 변할 것을 우려해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꾸었다. 태화관은 지금의 인사동 태화빌딩 자리로 이완용이 일제로부터 받은 순화궁을 당대 유명 요릿집인 명월관이 빌려 분점격인 태화관을 연 것이다. 지하철 종각역 3번 출구에서 골목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현재 태화빌딩 1층 로비에는 민족대표 29인이 그려 진 커다란 민족기록화가 걸려 있는데 그림의 인물이 29인인 것은 국외체류중이거나 미도착으로 선언식에는 29명만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두 시가 되어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친 뒤 “민족대표 일동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지금 축배를 들고 있다”고 일본경찰에 통고한 후 자진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는 아마 우리의 독립의지를 적극적으로 과시하려는 의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대표 강기덕, 김원벽이 주도하는 학생들의 독립선언행사가 진행됐다. 행사 중 한 청년이 팔각정 단상에 올라 소지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는데 후에 그는 30대 청년 정재용으로 밝혀졌다. 백운대 암벽에 독립선언서를 최남선이 쓰고 정재용이 읽었다는 내용이 한자로 서각 되어 있는바 그만큼 정재용에게도 큰 자랑이었을 것이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이화학당 고등과 학생 유관순 소녀는 5일, 다섯 명의 동지들과 남대문역(서울역)에서 귀향객들이 벌인 만세시위에 함께했다. 고향 목천(천안)으로 내려와서는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등을 돌며 만세운동을 독려했다. 그 후 4월 1일 아우내(並川)장터에서 3,000여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대학시절 병천 출신 유(柳)아무개 후배에게서 아우내 시위 중 쫓기는 유관순을 그의 할머니가 부엌에 숨겨주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종 장례식 후 각지로 귀향한 사람들로부터 점화된 독립만세 운동은 일제의 강압과 수탈에 격분한 농민들의 합세로 온 나라로 들불처럼 번져 전 국민의 약 10%나 되는 200만 여명 정도가 참여했다고 하니 우리 선조들의 애국심과 단결심을 가히 알만하다.
이날 그녀는 시위 주동자로 체포되어 헌병대로 압송되었으며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도 옥중투쟁을 이어갔고 이듬해 3월 1일에는 동지들과 옥중만세운동을 벌였다. 경성의 법정에서는 “내 나라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 조선의 국권을 침탈한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나를 재판하느냐?”라며 끝까지 항거했다고 한다.
최근 이 상황을 주제로 한 ‘항거’라는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재판 중 일본인 검사에게 걸상을 던져 법정모독죄 가산으로 7년 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9월 28일 결국 옥중에서 치열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나이 겨우 18세였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아우내장터 시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마저도 일본 헌병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유 열사의 일생은 지난 해 3월 뉴욕타임스의 보도로 해외에도 널리 알려졌다. NYT는 유 열사의 출생과 성장과정,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업적 등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뉴욕 주는 유 열사를 기리는 ‘3.1운동의 날’ 결의안을 채택했고, 롱아일랜드 낫소 카운티도 ‘3.1운동의 날’을 지정하고 ‘유관순 상’도 제정했다고 한다. 콜로라도에서도 유 열사의 업적을 기리는 결의안이 채택됐다. 이들은 모두 3.1운동이 자유와 인권을 위한 투쟁이고 전 세계가 공유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아아! 유관순 열사가 가신지 100년.
그 애국사랑의 뜨거운 피는 지금도 필자를 비롯해 우리 가슴에 흐르고 있는 것이다.
장준문/ 조각가,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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