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알다시피 유관순 열사가 참여한 천안 아우내 장터의 시위엔 3000여명이나 몰렸다. 이 시위에서 일본 헌병과 순사들이 쏜 총으로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을 비롯해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유관순 열사는 "나의 유일한 슬픔은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것이다"라고 했다. 뼛속까지 애국심으로 가득찬 유관순 열사는 가족 모두가 대단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그러나 이를 아는 국민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 동풍신(董豊信, 1904-1921)은 함경북도 명천(明川) 출신으로 1919년 3월 15일 하가면 화대동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은 3월 14일 함경북도에서 펼쳐진 만세시위 중 최대 인파인 5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화대헌병분견소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한 곳이다.
이날 화대장터에는 오랜 병상에 누워있던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董敏秀)가 전날의 시위 때 일제의 흉탄에 동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음을 각오하고 병상을 떨치고 일어나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동풍신의 아버지는 만세시위를 벌이던 중 길주헌병대 제27연대 소속 기마헌병과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동풍신은 현장으로 달려와 아버지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통곡하였다.
동풍신이 슬픔을 딛고 결연히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위군중은 크게 감동하여 힘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면사무소로 달려가 사무실과 면장집과 회계원집을 불태우면서 일제의 만행에 항거하였다.
그러다 동풍신은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악랄한 고문 끝에 17살의 꽃다운 나이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 할 정도로 유관순 열사와 필적할 만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이룬 동풍신 애국지사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유관순 열사와 같은 나이에 유관순이 아우내장터를 이용하여 만세를 불렀다면 동풍신은 화대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유관순의 아버지가 일제의 총검으로 현장에서 죽어 간 것과 동풍신의 병든 아버지가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그 자리에서 죽어 간 것도 닮았다. 그러나 한 분은 만고의 열사가 되고 한 분은 이름조차 들어 본 적이 없는 것은 어인 일인가?
이는 남북한의 분단에 의한 정치적 입김에 따른 역사기록의 편향성 때문이라고 본다. 해방공간에서 우리는 독립운동가를 제대로 추스를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념 아래에 갈라서는 운명을 맞이했다.
이어서 터진 1950년 한국전쟁은 민족 간의 피를 불렀고 이후 남한에서는 북한에 관한 것이라면 모두 적대시하는 분위기에서 북쪽 출신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할 수 있는 여건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일제 식민의 역사가 전개된 것은 남북한 분단 이전의 일로 그 당시 조선인은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식민지를 벗어나는 것과 조국광복을 일생의 필수 과제로 여기며 고군분투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 출신인 유관순은 열사가 되어 방방곡곡에 비석을 세우고 기념관이 들어섰지만 북한의 동풍신은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활동상황 4줄이 고작이다. 여기서 유관순 열사의 애국정신을 깎아내리자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다. 유 열사의 조국사랑은 영원불멸의 정신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동풍신처럼 북쪽 출신자들도 우리 겨레의 민족혼을 불태웠던 분들이니 만치 이제라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분들의 독립운동 활동을 발굴하여 널리 알려야 할 것이다. 연구자들의 깊은 관심을 기대하는 바이다. -
2012년 5월 1일자 수원일보에 게재된 [기획연재] 이윤옥 시인 '서간도에 들꽃 피다'(25)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는 기사를 발췌했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 북에서 활동했거나, 북으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은 어찌 한 둘이랴?
영화 '박열' 포스터 |
당시 세계감옥사에 一罪一犯으로써 햇수로 23년의 옥고를 치르고 살아남은 혁명가는 그가 처음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일제의 법정에서 '피고'의 신분을 단호히 거부하고 조선민족대표로서 조선의 왕의를 입고, 재판관에게 '그대'라는 호칭으로 일관한 공전의 사례를 남긴 독립투사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해방 후 북한에서 활약했다는 이유 하나로 남쪽에 기피인물이 되고 잊혀진 독립지사로 역사에 묻혀져 버렸다. 이 책은 박열 선생의 공판기록을 비롯한 자료들을 총정리, 선생의 생애와 사상의 전모를 밝혀낸 최초의 저작물이다." -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독립운동가의 존재 가치까지 덩달아 분단되었다는 아픔을 금할 길 없다. 지난 3.1절에 필자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특별 기획된 <3.1 독립만세운동 100주년 기념 100인전(人展)>이 열리고 있는 대전시 중구문화원을 찾아 취재를 했다.
거기에서도 느낀 바였지만 동풍신과 박열, 김원봉 등의 독립투사들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세계유일의 분단(分斷)국가다. 이런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통탄스럽거늘 독립운동가들의 인지도(認知度) 역시도 '분단'되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유감이다.
이제라도 남북의 관계자들이 만나서 이에 대한 개선의 여지와 함께, 남북이 모두 알 수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더욱 기렸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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