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제공 |
엘링 카게 지음 | 김민수 옮김 | 민음사
'이 세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있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수평선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 마음을 빼앗길 때, 혹은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초록색 이끼가 낀 바위만 보면서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할 때, 또는 그저 아이를 내 품에 안고 있는 그런 짧은 순간들이 나에겐 최고의 순간이다. 시간은 갑자기 제거되고 나는 마음속으로 존재하는 동시에 생각은 완전히 딴 데 가 있다. 돌연 짧은 한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질 수 있다. 마치 그 순간과 영원이 하나가 되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순간과 영원이 정반대의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순간과 영원은 저울의 양쪽 끝에 놓여 있다. 그러나 가끔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그랬듯이 영원과 시간의 그 짧은 조각을 구분할 수 없다. (…) 나는 이와 같은 경험들을 위해서 산다.' - 본문 중에서
누구나 침묵할 수 있지만 모두가 침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도시의 교통소음, 거리의 음악 소리, 기계 소리 등 세상은 소리로 우리의 매일을 둘러싼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이 소음 속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순간을 맞이한다. 인파가 가득한 해돋이축제에서 붉게 타오르는 새해 첫 해를 보거나 지금 막 태어난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는 경이의 순간, 주변의 세상은 완벽하게 차단된다. 경이는 그렇게 우리에게 침묵을 선물한다.
역사상 최초로 걸어서 남극에 도착했던 탐험가 엘링 카게는 극한 상황에서 침묵의 순간을 마주했다. 존재의 결정체 같은 그 완결한 순간의 경험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잊히지 않고 그와 함께하는 삶의 무기가 됐다. 신간 『자기만의 침묵』은 그가 경험한 침묵에 우리가 물어야 할 33개의 질문과 대답을 함께 엮어 완성한 책이다.
첫 번째 장의 에피소드는 많은 사람들이 침묵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이야기 한다. '대양이나 끝없이 탁 트이고 눈 덮인 벌판처럼 일종의 위엄'을 지니고 있는 침묵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자아낸다. 사람들이 음악을 틀고 문자를 보내고 라디오를 들으며 생각이 날뛰도록 내버려두는 건, 침묵 속에서 마주하는 자신의 진짜 모습이 두렵기 때문이다.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비트겐슈타인, 존 케이지, 뭉크, 올리버 색스 등 철학, 음악, 문학, 미술을 망라하는 저명한 사람들의 침묵을 들려준다. 뭉크의 「절규」는 소리없는 소음으로 그림과 수다스러운 침묵을 나누게 하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문장으로 말이 만드는 경계를 인식하게 한다. 다양한 사례와 자료는 침묵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실생활에서 침묵을 만들어 가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전달한다. 침묵이 인생을 경험하는 우아한 방법이자 시간을 사용하는 신비로움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하는 책이다. 본문 중간중간 사진에 담긴 극지의 고독도 생생한 침묵으로 다가온다.
박새롬 기자 onoino@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