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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잠시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다. 이른 아침 병실 천장에 설치한 스피커에서 조용히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었다. 그 중 '섬머 타임'을 잊을 수 없다. 단조롭게 무심한 듯 지친 마음을 보듬어 주는 빌리 홀리데이의 '섬머 타임'. 이 노래는 재즈 가수라면 한번 씩은 다 부른 노래다. 키리 테 카나와의 고음의 목소리도 감동적이다. 그치만 그때 들은 '섬머 타임'은 폐부 깊숙이 송곳으로 긁는 아픔이 느껴졌다. 거친 음색과 온갖 풍파를 겪은 듯한 절절한 창법. 이 가수가 누굴까. 나중에 확인해 보니 빌리 홀리데이였다.
당시 미국의 흑인들의 삶이 그렇듯 빌리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비참하게 죽었다. 어린 엄마에게서 태어나 먹고살기 위해 어린 나이에 백인 가정에서 청소하고 또 백인 남자에게 성폭행 당하고. 그야말로 밑바닥 하층민의 삶은 간신히 목숨을 연명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우연히 카바레에서 자신의 뛰어난 노래 실력을 선보여 가수로서의 성공적인 데뷔식을 치렀으나 마음 둘 곳 없는 외로움은 치유될 수 없었다. 몇 번의 결혼생활은 계속 파국을 맞았고 마약으로 점철된 삶은 결국 허망하게 삶을 마감했다. 예술은 편안하고 안정된 삶에서는 탄생할 수 없다. 고통을 겪은 자만이 예술로서의 승화를 누린다. 참 아이러니고 잔인하다. 예술가의 재능을 누리는 사람들은 행복하지만 정작 예술가들의 이승의 삶은 행복할 수 없다. 그것이 예술가들의 천형이고 축복이다. 나의 영원한 안식처 빌리 홀리데이의 '섬머 타임'.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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