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 참 빠르구나!……' '레테의 강'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잊혀졌던 기억들의 퍼즐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면 온 동네가 칠흙 같은 암흑으로 뒤덮였다.
그렇게 밤이 찾아오면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었기에 석유로 등잔불을 켰다. 학교서 내준 숙제를 하자면 등잔불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어야 했다. 그러자면 코 밑이 그을음으로 새까매져서 졸지에 '털보'가 되기도 다반사였다.
그나마 석유 값이 비싸니 어서 자라고 채근하던 할머니셨다. 초가집의 창호지 창문으론 하늘의 밝은 달빛까지 유성처럼 쏟아져 방안으로 마구 들어왔다. 그런 날엔 유독 더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럴 때 엄마라도 있었더라면…….
그래서 엄마의 젖가슴이라도 만진다면 어찌 만족의 깊은 잠이 오지 않았으랴! 여하간 할머니의 부지런한 부지깽이 덕분에 보리밥일망정 아침밥을 굶지 않고 등굣길에 나섰다. 학교는 검정고무신으로 얼추 십 리는 족히 걸어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학교가 필자로선 가장 설레는 미래의 청사진 장소였다.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해서 선생님 말씀처럼 동량이 되리라... 하지만 그런 마음가짐이 불과 얼마 되지도 않아 환상의 사상누각(砂上樓閣)으로 허물어질 줄은 정말 몰랐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더니 禍(화)는 하나로 그치지 않고 잇달아 찾아와 괴롭혔다. 홀아버지의 득병과 중학교 진학의 실패는 삭풍이 부는 역전의 소년가장으로 내미는 악재로 작용했다. 어쨌든 세월은 여류하여 필자 역시 환갑이라는 고지에 섰다.
올해 말이면 '정년'이라는 열차에 올라야 한다. <육체노동 정년 이제부터 65세>라는 뉴스가 반갑다. 그러나 그 적용이 언제일지는 미지수인 까닭에 정년 이후에도 상당기간 돈을 벌어야만 한다.
"늙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너는 늙어 보았느냐? 나는 젊어도 봤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어떤 자가당착(自家撞着)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세월은 주름으로 늙음을 대변하고 있으니 순응하고 볼 일이다.
아무튼 동창회에서 환갑여행을 가자는 공지를 보자니 새삼 <인간관계를 맺는 3가지 법칙>이 떠올랐다. 먼저, '369법칙'인데 사람은 세 번을 만나야 잊혀지지 않고, 여섯 번 정도 만나야 마음의 문이 열리며, 아홉 번을 만나야만 비로소 친근감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다음으론 <248법칙>이다. 다른 사람에게 두 개를 받고 싶다면 네 개를 주고, 네 개를 받고 싶다면 여덟 개를 주라는 것이다. 이를 인정해야만 비로소 좋은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끝으로 <911법칙>이다.
아홉 번을 잘해도 다음 열 번째, 또 그 다음의 열 한 번째는 더욱 잘하려고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조금만 친해져도 말이나 행동에 조심성이 없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이 경우, 좋았던 인연이 되레 악연으로 변할 수 있기에 이를 조심하라고 이른 말이지 싶다.
학생 수 감소로 3월 1일 폐교하는 부산시 사하구 감정초등학교의 마지막 졸업식과 재학생 수료식이 2월20일 열렸다. 수료증을 받아든 재학생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출처=중앙일보 |
2월 21일 자 중앙일보에 실린 사진과 글이다. 학생 수 감소로 오는 3월 1일부터 폐교하는 부산시 사하구 감정초등학교의 마지막 졸업식과 재학생 수료식을 취재하여 보도했다. 관련 사진은 '뉴시스'로부터 받아 사용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 모습을 보는 순간 진득한 안타까움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먼저, 폐교로 인해 올해가 부산 감정초등학교의 마지막 졸업식이 되었다는 것은 저출산의 부메랑이 빚은 '필연적 비극'이었다.
지인 중에 댐 공사로 수몰되고, 출산율 저하로 폐교되어 흔적조차 없는 초등학교에 대한 향수가 지독한 사람들이 있다. 등잔불을 켜던 시절에도 최소한 네댓 명의 아이를 낳았거늘 지금은…….
반대로 개교한 때가 우리 동창들과 같은 '59년생'인 모교 천안성정초등학교는 여전히 우뚝하기에 안도감을 느꼈던 것이었다. 지난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긴 하더라도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동화 속 주인공들은 바로 초등학교 동창들이다.
그들과의 환갑여행 때는 또 얼마나 화제만발의 에피소드가 낙수(落穗)로 쏟아질 지 벌써부터 기대가 적지 않다. 앞으로도 '인간관계를 맺는 3가지 법칙'을 견지하며 불변의 우정으로 아름답게 늙어가고 볼 일이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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