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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은이가 아니지만, 지은이일 수도 있습니다
얼굴 속에 얼굴을 넣고 다녔습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매점엘 갑니다
나는 지은이를 들키고 싶지 않아 책상에 엎드려 자는 척을 합니다
눈을 뜨자 저녁이 차려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엄마를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지은이를 지우고 다른 얼굴을 답니다
콩자반을 집어 먹으며 내가 몇 개인지 셉니다
끝까지 세기 어려워 다시 처음부터 셌을 뿐인데 무한히 늘어난 검은 눈동자들이 나를 쳐다봅니다
욕실로 달려가 비누로 얼굴을 문지릅니다
표정은 자꾸 손끝에서 미끄러지고 나는 나를 몇 번이나 놓칠 뻔했지만 얼굴들을 잘 씻어 서랍 안에 넣어둡니다
수건처럼 개켜진 옆면들, 내가 너인 순간들
함부로 뒤집어 벗어놓은 이 얼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베란다에 가보면 엄마가 내일 사용해야 할 얼굴들을 빨랫줄에 널어두었습니다' -뒤표지 글 전문
대전 출신 임지은 시인의 첫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가 출간됐다. 시인은 2015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개와 오후」 외 네 편을 발표하며 등단, "이미지에 대한 변전(變轉)의 상상력이 과감"하고 "일상적 삶의 풍경들을 간결한 터치로 낯설게 녹여"(문학평론가 강계숙, 강동호)낸다는 평을 받은 바 있다.
『무구함과 소보로』에는 다양한 명사형 시어가 등장한다. 이들은 낱낱으로 해독되기보다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돼 독특한 영향을 주고받는다. 마치 도미노처럼 하나가 넘어져 다른 하나의 상태를 완전히 전복하는 방식으로 연쇄되는 것이다. '필통에 코끼리를 넣고 다녔다/지퍼를 열었는데 코끼리가 보이지 않았다/거짓말이었다/오렌지였다'는 시 「과일들」의 부분에 등장하는 명사들은 얼핏 무관해 보이는 존재들이 실은 무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명사들은 상상력으로 범람하며 기존에 부여받은 의미에서 벗어나 변화하면서 독자들을 생경한 지점에 옮겨 놓는다. 그 지점에서 시의 새로운 가능성 역시 열린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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