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혁 작곡가 |
1700년대 말에서 1850년대까지 이탈리아반도는 격변기였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으며 억압받던 때 통일을 통해 독립하려 했다. 이때 이탈리아인의 마음을 하나로 만든 음악이 나왔다. 바로 1842년 발표된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의 합창'이다. 조국을 잃고 고향을 그리는 내용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애국심을 더욱 고취시켰고 통일과 독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이탈리아는 물론 전 세계인이 사랑하는 곡이 됐다.
19세기 말 지구 북반구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선 러시아가 19세기 말 핀란드를 침공했다. 그들은 의회를 해산시키고 핀란드어를 못 쓰게 했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때 핀란드 국민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게 한 음악가가 있었다. 바로 시벨리우스다. 1900년 그는 '수오미(핀란드를 뜻함)여 일어나라'는 곡을 써서 민족의식 일깨웠고 독립을 위한 강한 용기를 갖게 했다. 이 곡이 교향시 '핀란디아'다. 지금은 세계 곳곳에서 연주되는 명곡이다.
그리고 한반도. 일제 강점기에 무장 독립투쟁을 했던 작곡가 윤이상 선생은 본 칼럼에서 소개했었다. 오늘은 작곡가 채동선 선생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는 1919년 3월 1일 3·1운동에 참여했다. 이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의 베를린 슈테른쉔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음악활동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창씨개명 요구를 거부하고 흰 한복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낮엔 농사를 저녁엔 작곡했고, 우리 민요 '새야새야, 진도 아리랑, 뱃노래' 등을 채보해 민족음악을 지키고자 했다. 그가 일제 강점기 1933년에 작곡한 '그리워'는 우리 민족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 그는 일제의 탄압과 회유 속에서 끝까지 지조와 소신을 지켰다. 해방 후 작곡활동에 전념했고 1951년 2월 2일 6·25 피난 중 부산에서 타계했다.
위에 미처 언급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음악가들과 서양의 음악가들은 조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아픔을 함께했다. 민족의식과 조국독립을 위해 음악으로 싸웠다.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올 3월엔 위에 언급한 작곡가들의 작품을 찾아들어 보자. 또 음악회장에서 그 음악들을 만나며 3·1운동 100주년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음악은 시대정신을 담아낸다고 했다. 그렇게 음악을 통해 우리는 선조들과 그 날들에 대하여 대화하고 다시 새로운 100년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안성혁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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