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공론] 말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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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공론] 말모이

장준문/ 조각가, 수필가

  • 승인 2019-02-12 10:46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말모이
영화 '말모이'(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연초에 영화 '말모이'를 관람했다. 필자는 평소 한글단체에 참여하는 등 우리 말글에 관심이 많아 개봉소식부터가 반가웠다. '말모이'는 천만관객을 훌쩍 넘긴 '택시운전사'의 각본을 맡았던 엄유나 각본, 감독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우리말사전 편찬에 관한 의미 있는 주제지만 과연 그것이 영화적 스토리가 될까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았다. 영화를 액션이나 코미디 같은 흥미위주관객들의 눈길을 끌만한 소재는 아니라서 대규모 관객을 기대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300만 가까운 알짜관객(?)이 들었다니 나름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다. 설 대목을 겨냥해 개봉한 '극한직업'이라는 코미디영화가 이미 천만을 훌쩍 넘겼단다. 그것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이지만 흥행에 연연치 않는 감독의 작가정신은 존경받을 만하다.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1940년대 경성의 모 극장 관리인으로 일하다 해고된 판수(유해진 분)가 생계문제로 길거리에서 가방을 날치기했는데 쓸모없는 것들만 잔뜩 들어있었다. 그 후 잡일이라도 얻겠다고 조선어학회에 들렀는데 면접관 중 한 명이 공교롭게도 가방 주인인 대표 류정환(윤계상 분)이었다. 류정환의 분노로 쫓겨날 판에 일부 회원들 덕분에 까막눈인 판수는 한글을 익히는 조건으로 그들과 함께 한다. 돈도 아닌 말을 왜 모으느냐며 불평하던 판수는 '가갸 거겨'를 배우며 우리말에 눈을 뜬다. 학회가 말 모으기에 어려움을 겪던 중 판수가 각 지방의 토속어를 쓰는 사람들을 대동해 온다. 마치 황야의 무법자들의 출현 같은 반전 신(scene)이었다. 학회는 그들로부터 각처의 맛깔 나는 방언들을 모은다. 갖은 위험 속에 만들어진 26,500장의 원고는 부산 모처에 숨겨두고자 판수가 원고가 든 가방을 들고 경성역으로 가던 중 일경(日警)의 추격에 몰려 조선통운 창고 안으로 가방을 던져 넣고 일경의 집중 총격으로 사망하고 만다.

작품의 주제는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의 생명입니다"라는 류정환의 대사로 명료하다. 주인공인 판수라는 캐릭터를 포함해 조선어학회에서 '말모이'를 만든다는 주제 등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허구적 내용이다.



영화는 일제강점기 막바지인 1942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구호아래 창씨개명 등 황국신민화를 목표로 우리말을 비롯하여 민족정신 말살정책을 본격화하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애국적 지식인들은 목숨 걸고 지금의 국어사전의 모태가 되는 '말모이'라는 우리말 모음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영화 결말부의 26,500장의 '말모이' 원고상자는 해방 이틀 전 상고심 재판 증거물로 제시되었다가 방치돼 있던 것이 광복 후인 1945년 9월 8일 경성역 창고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때 만일 애국적 지식인들이 목숨 걸고 '말모이'를 만들지 못했거나 원고를 보존하지 못했다면 지금 우리 한글은 많은 정체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충심을 다한 그분들에게 깊은 경의를 드린다.

여기서 '말모이'가 있게 된 과정을 살펴보자.

한말에 시작됐던 한글운동이 3·1운동 후 다시 일어나면서 1921년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고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연구회에서는 민족정신의 근본이 되는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고 사전 편찬의 바탕이 되는 한글맞춤법통일안, 표준어사정, 외래어표기 등을 제정하는 등 우리 말글의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어사전편찬회는, 우리말의 문법과 구조의 기틀을 잡고 '한글'이라는 이름을 명명한 위대한 한글학자 주시경(1876-1914)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1930년대 중반부터 이극로(극중 류정환, 추정), 이윤재, 정인승, 한징, 정태진 등의 주도로 조선말 큰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한자어 사전을 우리말로 집필한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다. 순우리말과 한자어를 비롯해 외래어, 관용어, 사투리, 은어, 고유명사, 전문어, 고어, 이두 등 무려 16만 4125어휘를 수집해서 2만6000장의 원고를 6권의 책으로 묶어 냈다고 한다.

1941년 조선어학회에서 은밀히 '말모이'를 만들던 중 뜻밖의 사건이 발생한다.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安田稔)에게 발각되었다. 일경은 취조 중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정신을 일깨워 준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임을 파악했다. 일제는 정태진을 연행하고 고문으로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상해임시정부의 비밀결사체라는 자백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그로 인해 사전편찬에 가담한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정태진, 장지영 등 무려 33명이 검거됐다. 이것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영화 '말모이'의 주제다. 참고로, 33인 중 과반이 경상도출신이었지만 충청권에서도 충주출신 이강래 선생, 옥천 출신으로 이 후 충남대 문리대학장을 지낸 김형기 선생 등도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제는 3·1운동 후 부활한 한글운동 등 모든 편찬집회를 금지하고 민족단체를 해산하는 등 더욱 극렬하고 악랄한 황국신민화 정책에 돌입하기에 이른다.

다시 한 번 목숨 걸고 '말모이'를 만드신 애국적 지식인들에게 깊은 존경을 표한다.

장준문/ 조각가, 수필가

1-장준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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