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어떤 이들은 그걸 오직 말로만 존중한다. 과학, 과학! 사실, 사실! 자신들이 그것을 오직 선동구호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모른 채.
아카데믹 인문학을 표방하는 연구자가 현실에 대해 텍스트라는 재료를 경유하지 않고 강의하면 사이비다. 물론 인문학자도 현장을 탐험하는 특정한 기획 하에 무언갈 저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인문학은 텍스트, 다시 말해 구술, 문자, 영상을 포괄하는, 사유의 증거물로서 언어라는 매개 없이는 학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칫 술자리 개똥철학류 막연한 도덕론이나 인생론이 된다. 자구보단 실체적 삶이 중요하대놓고 그토록 중요한 삶에 몇 마디 말로 영향을 끼치려 하다니. 아서라, 자구에라도 매달려야 사기꾼이 되지 않는다.
인문학 강연이라는 형식 안에서라면 - 소설이든 영화든, 고전 구절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든 - 분명한 텍스트 근거와 재료를 예시로 넣어 논하는 것이 옳다. 그 자리에서 말과 책 따위로 결코 시원하게 해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삶의 문제에 감히 직접 다가가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되며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최소한 강연 방식이 일대일의 질문 상담으로 진행될 때일 것이다. 이것이 해당 학문의 메커니즘과 존재방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겸손이고 정직이다.
예술 텍스트는 허구이고 가짜다. 텍스트 안에서의 죽음은 실제의 죽음과 다르다. 죽음을 흉내낸 죽음이다. 그래서 더욱 맘껏 죽을 수 있다. 시인추방론을 주장한 플라톤의 관점을 빌려와봐도 그렇다. 예술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현실보다도, 더 낮은 단계의 그림자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가짜는 가짜라는 바로 그 속성 덕분에 이데아 또는 진리를 잘 담아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데아도 만질 수 없는 것이니 가짜가 아니냐 물으면 할 말도 없다. 후대의 학자들은 그렇게 그걸 해체하기도 했다.
인문학은 이처럼 무한한 자유와 근본적 한계 속에서 출발한다. 이야기 창작은 언어로 이루어진 허구이자 진실한 가짜인 1차 텍스트를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새롭고도 익숙한 세계에는 진짜처럼 보이는 일정한 물리 법칙 및 인과와 우연이 작동한다. 여기서 나와 같은 문학 연구자의 일은 2차 텍스트를 만드는 비평 행위에 속한다. 이는 진짜 세상과 묘하게 닮은 가짜 세상을 통해 진짜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의미를,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 생산하고 발굴하는 과정이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가지고 진지한 논의를 한다고 해서 대뜸 우습게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우습다. 세상만사 모든 걸 아는 체하며 '직접' 말참견하는 자칭 메시아나 구루 문인들을 힐난할 땐 언제고. 드라마로 역사를 배우고 영화로 나라 정책 결정하는 이들에 대한 반발심은 알겠는데, 당대에 유행하는 픽션이 현실의 이면을 비추는 거울임을 깡그리 무시한다면 스스로 자신의 무엇을 드러내는 중인지 돌아봐야하지 않겠나. 구별보단 뭉개기가 쉽다.
술자리 개똥철학은 나쁜가? 나쁘지 않다. 때에 따라 다르다. 가끔 우린 바로 그런 일상적 교류 속에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다만 차라리 인문학 같은 걸 내세우지 않는 편이 낫다. 개인사와 경험에 의한 통찰만 가지고 청중의 마음이 잘 움직일 수 있게 구성된 스피치를 통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김미경 대표의 활동처럼. 그것은 감정의 정화 내지 고양 등 음악적 효과를 주는 동기부여형 강연으로, 그런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자존감에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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