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아서라, 자구(字句)에라도 매달려야

  • 오피니언
  • 프리즘

[프리즘] 아서라, 자구(字句)에라도 매달려야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 승인 2019-02-12 09:12
  • 수정 2019-02-12 09:19
  • 방원기 기자방원기 기자
송지연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자구에나 매달리는 인문학자라고 남을 폄하하는 것은 마치 수술에만 매달리는 외과의사를 폄하하는 것과 같다. 나는 잘 알지 못하면서 데이터 통계와 과학적 사실을 그저 자기방어 내지 인정욕구의 무기삼아 휘두르는 것을 늘 경계하고 의심한다. 그게 내가 가진 과학적 태도다.

어떤 이들은 그걸 오직 말로만 존중한다. 과학, 과학! 사실, 사실! 자신들이 그것을 오직 선동구호로만 사용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모른 채.

아카데믹 인문학을 표방하는 연구자가 현실에 대해 텍스트라는 재료를 경유하지 않고 강의하면 사이비다. 물론 인문학자도 현장을 탐험하는 특정한 기획 하에 무언갈 저술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인문학은 텍스트, 다시 말해 구술, 문자, 영상을 포괄하는, 사유의 증거물로서 언어라는 매개 없이는 학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칫 술자리 개똥철학류 막연한 도덕론이나 인생론이 된다. 자구보단 실체적 삶이 중요하대놓고 그토록 중요한 삶에 몇 마디 말로 영향을 끼치려 하다니. 아서라, 자구에라도 매달려야 사기꾼이 되지 않는다.

인문학 강연이라는 형식 안에서라면 - 소설이든 영화든, 고전 구절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든 - 분명한 텍스트 근거와 재료를 예시로 넣어 논하는 것이 옳다. 그 자리에서 말과 책 따위로 결코 시원하게 해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삶의 문제에 감히 직접 다가가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되며 그게 가능하다면 그건 최소한 강연 방식이 일대일의 질문 상담으로 진행될 때일 것이다. 이것이 해당 학문의 메커니즘과 존재방식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겸손이고 정직이다.



예술 텍스트는 허구이고 가짜다. 텍스트 안에서의 죽음은 실제의 죽음과 다르다. 죽음을 흉내낸 죽음이다. 그래서 더욱 맘껏 죽을 수 있다. 시인추방론을 주장한 플라톤의 관점을 빌려와봐도 그렇다. 예술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한 현실보다도, 더 낮은 단계의 그림자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가짜는 가짜라는 바로 그 속성 덕분에 이데아 또는 진리를 잘 담아낼 수 있는 게 아닐까. 이데아도 만질 수 없는 것이니 가짜가 아니냐 물으면 할 말도 없다. 후대의 학자들은 그렇게 그걸 해체하기도 했다.

인문학은 이처럼 무한한 자유와 근본적 한계 속에서 출발한다. 이야기 창작은 언어로 이루어진 허구이자 진실한 가짜인 1차 텍스트를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새롭고도 익숙한 세계에는 진짜처럼 보이는 일정한 물리 법칙 및 인과와 우연이 작동한다. 여기서 나와 같은 문학 연구자의 일은 2차 텍스트를 만드는 비평 행위에 속한다. 이는 진짜 세상과 묘하게 닮은 가짜 세상을 통해 진짜 세상을 보는 관점과 의미를, 어디까지나 '간접적으로' 생산하고 발굴하는 과정이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가지고 진지한 논의를 한다고 해서 대뜸 우습게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우습다. 세상만사 모든 걸 아는 체하며 '직접' 말참견하는 자칭 메시아나 구루 문인들을 힐난할 땐 언제고. 드라마로 역사를 배우고 영화로 나라 정책 결정하는 이들에 대한 반발심은 알겠는데, 당대에 유행하는 픽션이 현실의 이면을 비추는 거울임을 깡그리 무시한다면 스스로 자신의 무엇을 드러내는 중인지 돌아봐야하지 않겠나. 구별보단 뭉개기가 쉽다.

술자리 개똥철학은 나쁜가? 나쁘지 않다. 때에 따라 다르다. 가끔 우린 바로 그런 일상적 교류 속에서 삶의 지혜를 배운다. 다만 차라리 인문학 같은 걸 내세우지 않는 편이 낫다. 개인사와 경험에 의한 통찰만 가지고 청중의 마음이 잘 움직일 수 있게 구성된 스피치를 통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김미경 대표의 활동처럼. 그것은 감정의 정화 내지 고양 등 음악적 효과를 주는 동기부여형 강연으로, 그런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자존감에 기여하고 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랭킹뉴스

  1. 학대 마음 상처는 나았을까… 연명치료 아이 결국 무연고 장례
  2. 원금보장·고수익에 현혹…대전서도 투자리딩 사기 피해 잇달아 '주의'
  3. 김정겸 충남대 총장 "구성원 협의통해 글로컬 방향 제시… 통합은 긴 호흡으로 준비"
  4. [대전미술 아카이브] 1970년대 대전미술의 활동 '제22회 국전 대전 전시'
  5. 대통령실지역기자단, 홍철호 정무수석 ‘무례 발언’ 강력 비판
  1. 20년 새 달라진 교사들의 교직 인식… 스트레스 1위 '학생 위반행위, 학부모 항의·소란'
  2. [대전다문화] 헌혈을 하면 어떤 점이 좋을까?
  3. [사설] '출연연 정년 65세 연장법안' 처리돼야
  4. [대전다문화] 여러 나라의 전화 받을 때의 표현 알아보기
  5. [대전다문화] 달라서 좋아? 달라도 좋아!

헤드라인 뉴스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충남 행정통합 첫발… '지방선거 前 완료' 목표

대전시와 충남도가 행정구역 통합을 향한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장우 대전시장과 김태흠 충남지사, 조원휘 대전시의회 의장, 홍성현 충남도의회 의장은 21일 옛 충남도청사에서 대전시와 충남도를 통합한 '통합 지방자치단체'출범 추진을 위한 공동 선언문에 서명했다. 대전시와 충남도는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 지방소멸 방지를 위해 충청권 행정구역 통합 추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대를 갖고 뜻을 모아왔으며, 이번 공동 선언을 통해 통합 논의를 본격화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공동 선언문을 통해 두 시·도는 통합 지방자치단체를 설치하기 위한 특별..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대전 자영업은 처음이지?] 지역상권 분석 18. 대전 중구 선화동 버거집

자영업으로 제2의 인생에 도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정년퇴직을 앞두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신만의 가게를 차리는 소상공인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자영업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나 메뉴 등을 주제로 해야 성공한다는 법칙이 있다. 무엇이든 한 가지에 몰두해 질리도록 파악하고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받기 때문이다. 자영업은 포화상태인 레드오션으로 불린다. 그러나 위치와 입지 등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아이템을 선정하면 성공의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에 중도일보는 자영업 시작의 첫 단추를 올바르게 끼울 수 있도록 대전의 주요 상권..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尹정부 반환점 리포트] ⑪ 충북 현안 핵심사업 미온적

충북은 청주권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주민 숙원사업이 널려있다. 모두 시·군 예산으로 해결하기에 어려운 현안들이어서 중앙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사업들이다. 이런 가운데 국토균형발전에 대한 기대가 크다. 윤 정부의 임기 반환점을 돈 상황에서 충북에 어떤 변화가 있을 지도 관심사다. 윤석열 정부의 지난해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발표한 충북지역 공약은 7대 공약 15대 정책과제 57개 세부과제다. 구체적으로 청주도심 통과 충청권 광역철도 건설, 중부권 동서횡단철도 구축,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구축 등 방사광 가속기 산업 클러스터 조..

실시간 뉴스

지난 기획시리즈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오피니언

  • 사람들

  • 기획연재

포토뉴스

  •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대전-충남 행정통합 추진 선언…35년만에 ‘다시 하나로’

  •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대전 유등교 가설교량 착공…내년 2월쯤 준공

  •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중촌시민공원 앞 도로 ‘쓰레기 몸살’

  •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 3·8민주의거 기념관 개관…민주주의 역사 잇는 배움터로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