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기 전 마신 커피 탓일지도 모르겠다. 웬일인지 이른 새벽부터 눈이 번쩍 떠졌다. 애써 다시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했다. 늘 입는 그 옷, 늘 신는 그 신발, 늘 메는 그 가방에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직 출근 시간은 2시간 가까이 남아 있었다.
하필이면 늘 타던 그 603번도 '잠시 후 도착'이다. 버스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에 생각이 바뀌었다. 그냥 다른 길로 가볼까. 원래 타려던 버스를 두고 엉뚱하게 뒤따라오던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 버스는 603번과 나란히 길을 가다가 사거리에서 회사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길을 틀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낯선 동네 풍경을 한참 보여줬고 오랜만에 창가를 바라봤던 듯 하다. 그러다 어느 새 버스는 시청 앞까지 당도했다.
사무실은 정시에 무사히 골인! 평소 20분이면 가던 거리를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버스와 지하철을 갈아타며 도착했다. 시청역사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던 동안 혹시 회사에 늦게 도착하지는 않을지, 아침부터 괜한 오기를 부렸던 것은 아니었는지 살짝 걱정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별다른 문제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새롭고 낯선 기분으로 일을 시작하니 집중도 훨씬 잘 되는 듯 했다. 가끔 늘 같은 차림에 같은 길로 도착해 같은 공간 속에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랬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돌이켜보면 매일 아침 나서는 그 길로 가느냐 마느냐는 나 스스로 정해놓은 틀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도 어떻게든 목적지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가장 빠른 방법이나 경로는 아니라 천천히 돌아가게 되더라도 즐거운 여정일 수 있었다. 하지만 늦으면 안 된다는 조바심 때문에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없었고 다다르는 과정 속 소소한 즐거움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삶에서 꼭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결과를 정해놓고 그 답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안된다고 정해놨던 일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그간 우리가 정해왔던 목표도 이루지 않아도 괜찮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옥죄어 왔던 건 없었을까. 전유진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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