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시대를 배경으로 한글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어학회 사건의 실화를 다룬 시대극이었다.
예고편을 본 뒤로 줄곧 영화 개봉일을 기다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조선어학회원 가운데 혹시 대전 사람은? 혹시 충청인은 없었을까?
영화를 본 후에는 인물 한명 한명을 검색하며 그들의 출생지와 이력을 살폈다. 하지만 지역의 인물은 없었다.
검색에 의존해 혼자 만의 힘으로는 풀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지역대학 국문과 교수들에게 자문을 요청했다.
잘 풀리려고 했던 걸까, 우연히 타대학 교수님의 소개로 백낙천 배재대 한국어교육원장님과 인연이 닿았다.
백 원장님은 '조선어학회 33인 가운데 대전 혹은 충청인이 있을까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시경 선생과 조선어학회와 관련한 자료가 내게 꽤 있지만, 충청인이 있을까라는 의문을 한번도 갖지 않았다며 백 원장은 이틀의 말미를 달라고 했다.
솔직히 모 아니면 도였다.
없어도 크게 실망할 건 아니었다. 조선어학회가 서울에서 주로 활동 했던 터라 충청인은 없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백낙천 원장과의 두번째 통화는 새로운 뉴스, 새로운 인물의 발견으로 이어질 수 있는 희망적인 단서가 됐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당시 옥고를 치른 사람은 33인이었다. 이 가운데 충북 충주 출신이 한 명 있었고, 그가 바로 이강래 선생이었다.
33명 중 단 한사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역사 속 충청인과의 만남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강래 선생의 정보를 얻은 그 무렵, 충남대 송백헌 명예교수를 통해 조선말표준어 최연소 사정위원이자, 충남대 문리대학장을 지낸 김형기 선생까지 알게 됐다.
영화 말모이에서 시작한 충청인 찾기가 이강래, 김형기라는 보석을 찾아내는 도화선이 된 셈이었다.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원고지 7~8매 분량으로 그들의 일생을, 업적을 평가 할 수 없다 해도 역사 속에 잠들어 있는 그들을 수면 위로 꺼내는 것은 의미 있는 기록의 순간이다.
대전을 대표하는 인물은 흔치 않다. 그나마 충청권으로 범위를 넓혀야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던 인물들과 만날 수 있다. 그동안 대전은 사람을 기록하는 일은 좀처럼 노력하지 않았다. 중구 어남동에서 태어난 신채호 선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대전인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 그 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충청에 살았던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기도 하다.
이해미 교육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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