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우 회장 |
오디오에서는 김정호의 노랫소리가 매력적으로 들린다. 우리의 인생을 얘기하듯 김정호는 예전에도 현재도 내게 노래를 들려준다. 이런 날이면 청승맞게 슬픈 노래가 고독함에 불씨를 지피지만 기쁨보다 고독한 슬픔이 더 좋은 날도 있다.
살다 보면 가끔은 인생의 슬럼프를 경험하게 된다. 잘 넘기면 발전적이지만 이겨내지 못하면 낙오될 수 있다. 예술가에게는 누구나 겪게 되는 열병이기도 하지만 요즘 느끼는 슬럼프는 젊은 날의 슬럼프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먼지를 털어내듯 그러려니 하면서 지나칠 수 있는 걸 보면 몸에 인(忍)이 박혔나 보다.
씁쓸한 긍정이다.
지난날에는 그림이 내 인생에 전부였지만 그 전부를 하기 위해 그곳에 와서부터는 그것이 전부가 아닐 때가 있다. 그림보다 지금 내 전부는 나를 필요로 하는 일들과 그 안에서 찾는 또 다른 유희를 찾는 것이다.
세월이 더 흘러 내가 지금보다 보잘 것 없는 화가가 되어 있더라도 그림과 함께한 더 즐거운 인생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아마 그것이 그린다는 것과 다른 나의 작품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요즘 벌곡 작업실 옆에 흙을 고르고 평평하게 덮고 일하는 동생과 시간 날 때마다 흙 놀이를 했다. 귀하게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안식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 터에 그런 공간을 만들어야겠다.
시골생활은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한다. 한나절 땀을 흘리고 일하면 기분이 이내 편안해진다.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몸뚱이는 며칠 일했다고 몸살로 아파올 지라도 말이다. 도시에선 몇 날 며칠 일해도 괜찮은데 말이다. 익숙함이란 거 무시 못 할 노릇이다.
그래도 힘들고 지칠 때면 동굴을 찾듯 벌곡 작업실을 찾는 걸 보면 집보다 편안한 중년의 내 모습을 감지한다. 내게 허락된 자유라서 그럴까?
벌곡 작업실에 와서 내가 유희를 하는 건, 보잘 것 없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때론 그림보다 더 재밌는 놀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놀이지만 잡념을 없애주고 머리를 비울 수 있게 해 주니 내게는 가치가 있다.
이 애경님의 <그래도 눈물이 나>란 책에서 보면,
싫은 일은 하지 마라
미운사람은 만나지 마라
가기 싫은 자리 가지 말고
먹기 싫은 건 먹지 말라.
인생은 짧다.
경우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너 자신한테 먼저 집중하고 살아라.
어디 이게 쉬운 일인가. 먹기 싫은 것도 먹고 있으니 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겠는가?
내게 집중하고 살 때가 아주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나는 알고 있다.
자연이 주는 평화는 어떤 종교보다 더 깊다는 것을 말이다.
그림 그리는 일 외 나의 유희의 시간이 감사하다. 언젠가는 내게 주어진 지나친 자유가 있는 날도 오겠지….
나의 본질에 충실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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