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여행이란 그것이 국내여행이든 국외여행이든 우리 사회에서 일상처럼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더구나 수많은 미디어들이 여행기를 동영상으로 제공하고 있고, 아예 여행전문 미디어들은 이 일을 직업으로 삼아 24시간 송출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여행기를 쓴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쉽게 주목받기 어렵다. 장소, 대상, 방법, 감성, 사유, 문체, 흥미 등, 이른바 내용과 형식의 어느 한 면에서라도 문제적이어야만 주목을 끌 수 있다.
송백선 선생의 여행기 두 권을 연달아 읽으면서, 특히 이번 서평의 대상이 된 『파타야 해변에서 별을 헤다』를 읽으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질문하며 그것에 대한 답을 사유하고 반추해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첫째, 여행에의 욕망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에겐 수많은 욕망이 있어서 그 수를 헤아리는 일조차 불가능하거니와 그 가운데서 여행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지속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이에 대한 일반적이며 학술적인 답은 이미 관광학 개론서만 읽어도 충분히 만나볼 수 있지만 그런 일반론적이고 공식적인 내용 너머의 사유를 좀더 새롭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계속해서 일어났던 것이다. 특히 85세라는 연령이 되어서도 여행에의 뜨거운 욕망과 사랑을 담고 있는 송백헌 선생의 여행기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은 더 짙게 찾아왔다.
나는 여기서 여행에의 욕망이란 살아 있음의 욕망을 넘어서 세상에 대해 깊은 애정을 보내고 그 세상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림과 포용의 에너지 장(場)을 꿈꾸고 구축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갇혔던 나를 여는 일, 분리되었던 나를 통합시키는 일, 소극적인 나를 해방시키는 일, 먼 곳에 있었던 세계를 맞이해 들이는 일, 낯설어서 두려웠던 세계와 화해하는 일, 갈 수 없었던 세계를 갈 수 있는 세계로 만드는 일, 이런 일들이 여행을 추동하는 근본 요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이런 여행에서 한 인간을 감싸는 에너지 장은 높은 차원으로 상승한다. 그 높은 차원을 경험하는 일은 달라진 자신을 경험하는 일이요, 그 달라진 자신을 경험하는 일은 자기신뢰와 자기발전은 물론 세상을 향한 신뢰와 발전에 대한 희망을 속 깊은 데서 느끼는 일이다.
둘째, 인간이 기록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기록은 인간적 기억의 문명화된 장치이다. 그런 점에서 기록을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문명인의 일을 훈습하였고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아닌 그 누가 기억을 기록한단 말인가. 또한 문자를 모르는 그 누가 경험을 기록할 수 있단 말인가. 송백헌 선생의 여행기를 보면서 오래 든 질문과 사유의 또 한 가지 내용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송백헌 선생의 여행기를 보면 알겠지만 선생은 기록의 탁월한 수행자이며 그 기록하는 일과 과정에서 오는 기쁨을 남모르게 향유하는 사람이다.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구성부터 전개과정까지, 나날의 일정과 그 찾아간 장소와 주변풍경 하나하나까지, 선생은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이처럼 여행의 전 과정을 건너뛰지 않고 기록한다는 것은 엄청난 품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선생에겐 이것이 일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였고, 기록함으로써 선생은 역사가이자 설득력 있는 담론가의 면모를 시현하고 있었다.
여기서 나는 문득 생각난 바가 있다. 송백헌 선생은 역사소설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역사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한국근대역사소설연구』라는 저서를 출간한 바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선생의 이런 역사소설에의 관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학문적 연구의 전 과정에서 언제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역사, 역사소설, 역사소설 연구가의 그 치밀한 '사실 기록'의 탁월성이 이 여행기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의 기록은 그렇게 빛나는 외양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실의 기록이야말로 모든 글과 삶의 저변을 튼튼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소위 '펀더멘털'을 형성하는 기초가 된다.
이런 점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생각나는 바가 있다. 그것은 송백헌 선생의 박학다식과 담화술이다. 어쩌다 전화통화를 한 번 하게 되면 한 시간 정도는 쉴 새 없이 흥미로운 새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는 선생의 박학다식과 담화술은 '기록하는 자'로서의 토대가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記錄'이라는 한자어가 가리키듯이 기록은 '몸의 최종 심판관인 손으로 써서 새기는 일'이다. 그러니 기록만큼 힘이 있는 것도 달리 없다.
셋째, 여행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사와 문학사, 아니 정신사 와 미학사 속에서 여행문학은 오래된 것이면서 그 향유 영역이 넓고 세계가 아주 자유로운 가운데 내밀한 장르이다. 근대 이전에도 그랬거니와 이른바 퍼스낼리티가 한껏 존중되고 찬양된 근대에 이르러서는 이 여행문학이야말로 더욱더 위와 같은 모습을 화려하게 드러내었다.
송백헌 선생의 여행기는 이 여행문학과 관련시켜 사유할 만한 부분을 크게 담고 있다. 여행이 단순한 기록이나 일상이 아니라 문학이 되어야만 완성된다는 생각이 이 여행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문향을 풍기는 두 권의 여행기가 연달아 출간될 수는 없는 일이다.
여행과 문학! 그렇다면 여행이 문학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할까? 왜 여행은 문학이 되어야 할까? 선생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 하나는 여행은 문학이 됨으로써 소비적이고 도구적인 성격을 벗어나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예술의 일로 승격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여행은 생존 너머의 새 영역을 열어보이는 인간의 고차원적인 과업이 되고, 인간은 여행을 함으로써 문학인이자 숭고한 인문학적 존재가 되는 길을 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 둘째는 여행이라는 그 드문 경험을 고급한 대화의 장으로 제출하는 일이다. 여행이 문학이 됨으로써 여행은 다듬어진 공적 언어로 거듭나게 되고 그 언어는 읽는 이들에게 규율과 승화가 가져다주는 향훈을 맡게 한다. 그러나 여행이 문학이 되게 하는 길은 쉽지 않다. 더욱이 좋은 문학이 되게 하는 일은 아주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문학이 되고자 할 때 여행은 자칫하면 거기에 스며들기 쉬운 범속성을 한껏 거둬내게 된다. 그리고 여행과 관련된 모든 경험에 대해 '생각하는 인간'이자 '예술적인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한층 밀도 있게 작동시키게 된다.
송백헌 선생의 여행기를 두고 위와 같은 세 가지 문제에 대하여 사유해 보았다. 이미 여행이 전 계층과 전 세대로 너무나도 넓게 확장되었고, 예전과 달리 지구상엔 어느새 '먼 곳'이니 '오지'니 하는 말로 부르며 가볼 수 없는 상상의 지대로 남아 있는 곳이 사라진 형편이어서 구체적인 여행지를 언급하며 이 책의 성격을 드러내기보다 위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토머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책 제목이 가리키듯이 이제 세계는 둥근 것이 아니라 평평한 것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백헌 선생의 여행기에서 꼭 한 곳의 여행지에 관한 글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여행기 맨 앞에 수록된 「죽의 장막, 중화인민공화국 방문 회고기」이다. 이 글은 우리나라가 1992년 중국과 정식 수교를 하기 이전, 그러니까 1989년 2월 12일부터 21일까지의 9박 10일간, 전국 대학신문사 주간 교수들이 세계적으로는 냉전체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국내적으로는 민주화의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던 시기에 공산권 국가를 찾아보고 학생지도에 도움을 받고자 감행했던 중국 방문기이다. 이 글 속에 담긴 전국대학신문사 주간 교수들의 노력과 고민, 중국의 현실 앞에서 느낀 놀라움과 비장함 등은 송백헌 선생의 필력에 힘입어 고스란히 살아나고 있다. 이 글은 여행기를 넘어 사적 자료로서도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중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그러하다. 어디 세계뿐인가. 우리들 자신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러니 여행 또한 계속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여행의 방식 또한 계속 새로워져야 하리라.
그런 가운데 인간들의 삶은 여행이 누적된 시간과 역사만큼 높은 차원으로 들어올려져야 하리라.
정효구 평론가·충북대 교수
정효구 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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