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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K. 제미신 지음 |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한해 가장 뛰어난 SF문학에 수여되는 'SF계의 노벨문학상' 휴고상을 3년 연속 수상한 작가가 지난해 탄생했다. 1953년 제정 이래 최초다. 이미 2016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로는 처음으로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해 휴고상의 역사를 새로 쓴 노라 제미신(N. K. 제미신)이 그 주인공이다. 그에게 상을 안긴 세 작품은 모두 「부서진 대지」라는 하나의 시리즈로, 시리즈 전부가 수상작이 됐다. 제미신에게 2016년 첫 휴고상의 영광이 된 『다섯 번째 계절』이 최근 국내에 출간됐다.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무대는 대지모신과 정반대되는 '아버지 대지'란 개념이 지배하는 혹독한 세계, 그 안에서도 '고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거대한 초대륙이다. 이곳에는 최소 반년, 길게는 수 세대가 지나도록 지진 활동이나 다른 대규모 환경 변화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재해의 시기인 '다섯 번째 계절'이 있다. 인류 중에는 '오로진'이라는 소수의 부류가 존재하는데, 이들은 지진 활동과 관련된 에너지를 조종하는 특수 능력인 조산력(造山力, Orogeny)을 지닌 채 태어난다. 그러나 대다수의 인간들은 거대한 능력이 있으나 때로 이 힘을 통제하지 못하는 오로진을 '로가'라는 멸칭으로 부르며 적대시하고 두려워하며, 심지어는 오로진으로 발각되는 어린아이를 살해하기도 한다. 그런 한편 대륙 중심지에는 어린 오로진을 모아 가혹한 훈련을 시키며 순종적으로 길들인 후 철저하게 관리하며 착취하는 기관 펄크럼이 있다.
『다섯 번째 계절』은 능력을 숨기고 작은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자식을 잃고 만 에쑨, 부모에게서 버림받고 낯선 이의 손에 이끌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다마야, 펄크럼의 의무에 속박된 채 임무를 수행하러 나선 시에나이트, 이 세 오로진 여성의 시점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가혹한 운명에 따라 모험을 떠나게 되는 세 인물의 관계가 차츰 밝혀질수록, 억겁의 세월 동안 오로진이 차별과 멸시를 당하게 된 근원과 대륙에 닥친 계절의 비밀 역시 실체를 드러낸다.
SF소설의 세계관이 현실을 반영하게 된다는 점에서 『다섯 번째 계절』 속 인물들의 가혹한 운명과 멸시는 인류가 자행해 온 차별의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흑인 여성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백인 남성 작가 위주의 SF문학계에서 순탄한 길을 걷기 어려웠을 작가의 삶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 2016년 '다섯 번째 계절' 출간 당시 《가디언》과 가진 인터뷰에서 제미신은 "흑인 여성으로서, 나는 현상 유지에 딱히 관심이 없다. 내가 왜 그러겠는가? 지금의 현실은 해롭다. 상당히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데다, 그 외에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한가득"이라고 밝혔다. 2017년 두 번째 휴고상 수상에 대해선 흑인에 대한 역차별 덕분에 받은 거라는 폄하를 받기도 했다.
2018년 최우수 장편상 수락 연설에서 그는 「부서진 대지」 3부작이 미국의 현재에 느끼는 자신의 감정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있었던 구조적 압제를 그린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휴고상을 받는 이유가 그 무엇도 아닌 실력이라고 강조했다. "이 장르 역시 더 넓은 세상의 축소판일 뿐, 세상의 옹졸함과 편견에서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고 봅니다.(…) 올해는 제가 그 모든 반대자들, 제가 이 무대에 설 자격이 없으며 저 같은 사람은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없고, 우리는 그들처럼 실력이 아니라 '정체성의 정치' 때문에 상을 받은 것이라 외치려 드는 형편없고 좀스러운 한 명 한 명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해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으며 거대하고 빛나는 로켓같은 가운뎃손가락(휴고상 트로피의 모양은 로켓이다)을 들어 줄 것입니다." 한 번도 두 번도 아닌 세 번. 시리즈 전체가 상을 받은데 더 이상 다른 수상의 이유를 대는 반대자는 나오기 어려워졌다. 제미신의 업적은 SF문학사에 남을 사건을 넘어 문학계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시리즈는 현재 20여 개국에 판권이 판매됐으며 미국 TNT 드라마 채널에서 드라마 제작도 준비 중이다. 후속작 '오벨리스크 관문(가제)'와 '돌빛 하늘(가제)' 역시 2019년 하반기와 2020년 상반기 순차적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박새롬 기자 ono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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