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준원 박사 |
2018 국방백서에서 주적이 사라졌다. 백서에서 주적 개념이 사라진 것은 남북 간에 화해 분위기가 확산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 것 같다. 그런데도 현 정권의 정치적 고려를 서둘러 반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특정 국가나 단체를 지칭해 주적으로 내세우는 국방백서는 여타 국가에서도 유례없는 일이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백서에 주적 표기 여부보다도 실질적인 군사력과 대응체제가 더 중요하다. 주적 명시는 심리적 위안은 될 수 있겠지만, 현실적 군사대응책이 우선이다.
역대 정권에서도 주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남북관계의 특수성 탓이다. 서울 불바다 엄포,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등이 터질 때마다 주적이 등장했다. 북한은 우리의 역대 대통령 얼굴을 병사들의 사격 타깃으로 활용했고, 우리도 이에 질세라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을 사격의 타깃으로 활용했다.
주적은 상존하는 현실적 적(real enemy)을 지칭한다. 풀어 말하면, 실제적인 교전과 대치의 대상을 말한다. 여기에 우리를 위협하는 테러집단과 여타 집단까지 포함될 수 있다. 휴전상태임에도 국지전 형태로 교전을 펼쳤던 남북한은 사실 항시적인 준 전시상태다.
반면에 가상의 적 또는 잠재적 적(potential enemy)은 언제든지 현실적인 적으로 표변할 수 있는 대상을 지칭한다. 냉전체제 시기엔 미국과 소련은 서로가 상대를 가상의 적으로 설정했다. 그러다 보니, 갈수록 국방비는 더 확대됐고 무기체계도 함께 발전했다.
냉전 체제 와해 이후에 미국의 군사전문가가 소련의 극동함대를 방문했다. 이들은 형편없는 시설과 무기체계를 보고 경악했다.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만들어 놓고 엄청난 두려움과 불안에 떨었던 자신들의 현실을 통탄했다.
게다가 잘못된 정보로 인한 심리전과 군비확충의 오류에 크게 실망했다. 상대를 공포의 대상으로 몸집을 부풀려서 인식한 것이 실수였다. 이런 과오는 우리 군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가상의 적 설정은 권력에 의해 상대로부터 위협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탓에 주로 집권체제를 위한 선전과 선동의 도구로 활용되기도 한다. 나치 치하에서는 유대인이 가상의 적, 냉전 하에서는 미·소가 서로의 가상의 적으로 등장했다.
그 결과가 어떠한지 지난 역사가 잘 설명해주고 있다. 적개심을 마냥 키우고, 허상을 만들어 현실인 것처럼 호도하는 것도 군의 심리전이라면 할 말이 없다. 군 병사들에게도 국내적 관점도 중요하지만, 국제정치적 관점에서 군사지형을 살펴볼 수 있는 교육이 절실하다.
한반도의 경우, 한국전쟁 이후 군사적 대치국면이 아직도 지속 중이다. 현 정부는 휴전상태에서 평화를 논하고 있다. 종전선언과 함께 진지한 평화가 논의돼야 마땅할 터인데, 이전 정권도 이 사안을 명쾌하게 풀어내지 못했다.
백서에서 주적이 사라진다고 현존하는 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쌍방이 무엇이 허상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못 하고 부질없는 대치국면에서 허덕이는 중이다.
왜 그럴까. 서로가 불신한 탓도 있지만, 그간에 북한의 도발로 인한 실질적 교전과 인적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북핵 탓에 이런 국면도 완전히 뒤바뀐 상태다.
국방부가 주적 삭제에 따른 국민의 심리적 불안감과 우려를 헤아렸다면, 이 사안을 북한과 진지하게 논의했어야 했다. 국방정책은 권력의 정치적 고려에 의할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 기반을 둬야 한다.
좀 더 지켜보면서, 북한과 함께 논의해야 할 사안을 서두른 배경이 더욱 궁금하다. 가뜩이나 북핵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처지다. 주적개념 삭제에 따른 국민의 심리적 우려와 불안제거에 국방부가 적극 나서주길 기대한다.
/서준원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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